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준업 Feb 12. 2024

포기할 수 있다는 것

기다렸던 발표날이 다가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여유로운 마음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오늘만큼은 밥도 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떨렸다.

지난 2년 간의 노력의 결과가 나오는 날이니 당연하다.


집에 있을수록 초조한 감정만 드는 것 같아, 무작정 밖으로 나와 집 앞의 공원을 산책했다.

못 풀었던 문제에 대한 아쉬움이 제일 크게 들었고, 만약 불합격하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걱정도 함께 밀려왔다.

그래도 나 자신에게 고생했다며 토닥이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진동이 울렸다.

예상대로 시험에 대한 결과가 나왔으니 사이트에서 확인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결과를 보자마자 덤덤한 목소리로 부모님께 소식을 전했다.


"저 떨어졌어요"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그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내 실력의 부족함을 깨닫고 불합격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서 그랬는지, 지난 2년 간의 마음고생을 이제라도 내려놓을 수 있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정말 후회 없이 달려왔다고 느껴서 그랬는지


스터디원들과도 결과를 공유했다.

합격한 스터디원들에게는 진심으로 축하를 전했고, 나와 함께 불합격한 스터디원들에게는 위로의 메시지를 보냈다.

1년 동안 한 명의 이탈자도 없이 함께 공부해 왔는데, 다 같이 합격하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우리 스터디에서 3명이나 입행에 성공한 것을 보면서, 한국은행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 몰랐던 내가 이러한 사람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큰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집에 와서 그동안 공부했던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전공 관련 책들과 모의고사, 그리고 시험에서 절대 실수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정성스럽게 정리해 놓은 나만의 핸드북까지

한창 공부하고 있을 땐 몰랐는데, 2년 간 정말 많은 것들을 공부했었구나

앞으로 이 내용들을 다시 볼 일이 있을까... 정리하면서 참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럼에도 그 어느 때보다 마음만큼은 여유로웠다.

앞으로 내가 뭘 하더라도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은 아니었다.

내 인생에서 한차례 큰 일을 치루고나니, 앞으로 일어날 일들은 그에 비하면 '별일 아니겠지'라는 생각에 가까웠다.

또 다른 새로운 길을 가게 될지라도 크게 두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어느 한적한 오후

나는 카페로 향했다.


오늘은 나의 새로운 방향을 결정하는 날이다.

한국은행에 한 번 더 도전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기관에 도전해 볼 것인가

지난 2년 간 한국은행은 내 인생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준비하는 동안 다른 기관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애초에 나는 2년 동안 공부할 자금만 모아서 퇴사했다.

예상치 못하게 아르바이트도 하고, 국가로부터 각종 지원금도 받을 수 있어서 돈이 좀 더 남아있을 뿐, 3년을 넘어가면 현실적으로 더 이상 공부를 이어나갈 수는 없었다.

한국은행에 1년 더 도전한다면 합격 가능성은 분명 작년보다 더 높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다른 기회들을 완전히 포기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은행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지 않았다.

처음에 목표로 했던 기간을 다 채우기도 했고, 그 기간 동안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나 스스로도 느끼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공부했던 것들을 정리하면서도 '그땐 나름 재밌게 공부했었지'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한편으론 이걸 또 볼 생각을 하면 아득했다.


이제는 정말 놓아주어야 할 땐가 보다.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는 것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노력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입행에는 실패했지만 나에겐 그동안 공부하면서 쌓아온 지식이 남아있다.

내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 이 지식이 나를 굳건히 지지해 줄 것이다.


그래!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일어서보자

매거진의 이전글 결전의 날, 그리고 완주의 가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