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구나무하려는 꿈

너를 통해 내가 달라지고 싶다면, 그건 정말 이기적이야

by 카풋


헬스를 잘 하려면 트레이너를 사귀면 되고, 언어를 배우려면 그 나라 사람을 만나라는 말이 있다. 사람을 그렇게 이용하다니, 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린 서로를 통해 각자의 세계에 침투하니까 틀린 말은 아닐테다.


"너는 단단하고 밝은 사람이야"라는 문장은 물구나무씨가 나와 헤어지면서 보냈던 DM 중 하나였다. 그는 이곳 저곳을 여행하며 인스타 피드에 물구나무 서기를 한 본인 모습을 자주 전시하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곧잘 신체미를 풍기며, 서핑하고 철인 경기를 나가는 것을 보면, 물구나무 서기는 그의 테스토스테론을 보여주려는 수단이었을 것이다.


딱 벚꽃이 길가에 가득 피었을 때였다. 밤공기에 사람들은 서로를 마주하며 카메라를 들고 있었고, 라이더 자켓을 입고 적당한 바람을 즐기기 좋은 날이었다. 몇 년만에 다시 만난 물구나무씨는 살이 쪽 빠져있었지만, 그 당당함은 여전했다. 왁스칠한 노랗고 가느다란 머리칼에, 빳빳한 카라가 세워진 회색 자켓, 그리고 딱 달라붙는 핏의 바지로 등장한 그는 오랜만이라며 포옹을 청했고, 주먹 하나의 거리를 두고 우리는 서로의 등을 토닥였다. 한동안 직접 연락한 적도 없었고, 우리는 인스타에 구구절절 자신의 일상을 캡쳐해서 올리는 편도 아니었다. 일주일만 여행을 온 터라서, 시간을 잘 써야 했다. 몇 년만에 서울에서 만나다니. 이전의 친밀했던 관계를 떠올리며 우리는 서울로를 정방향, 역방향으로 3바퀴를 빙빙 돌았다. 근황을 숨 쉴틈 없이 늘어놓기 바빴다. 나는 서울로에 가득한 새로운 나무들을 소개하고 싶어서 눈길이 갔지만, 말을 끊을 수는 없었다.


취업을 하고 즐겁게 여행을 다니던 이야기를 하던 그는 잠시 숨을 멈췄고, 앉을 곳을 찾았다. 재빠르게 길을 보고, 벤치가 있을 곳을 찾았다. 마침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었다. 옥상 쪽 탁 트인 곳에서는 서울역이 마주 보인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무릎만 애매하게 서로를 향했다. 노을이 딱 지고 있었던 7시, 노란 전등이 켜지자 봄밤이었다.


그는 바람을 즐기는 것 같았지만, 난 그렇지 않았다. 조금의 침묵 후, 연애를 주제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적절한 결혼이나 연애 시기는 무엇일까? 나는 잘 모르겠어, 그런데 다들 하더라고, 정착하면서 연애와 결혼을 하나봐. 그도 그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도 진로를 고민하면서도 연애와 결혼을 어찌할지 고민이라며, 애인과 의견이 맞지 않아 다퉜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마침 물구나무씨는 미국에서 인턴십을 신청해서 머물다가 서핑을 하고 돌아온 때였다. 평생 돌아다니면서 대사관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의사를 말하자 정착해서 가족을 만들고 싶어하는 여자친구가 울어버려서 이야기를 하기 어려웠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도 딱 박수를 치며, 나도 그래! 라고 대답했다. 나도 그것 때문에 의견이 안 맞을 때가 많았어! 라고. 왜 사람들은 꼭 당장 정착하려고 하는거야? 라고. 나도 너랑 비슷해라고.


그렇게 진로 이야기를 하던 중, 그는 배고프다고 말했고, 9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우리는 명동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카카오맵으로 주위 식당 검색을 위해 별점을 체크하면서도, 나는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 적절히 반응할 수 있었다. 괜찮을지는 모르겠어, 라고 말하면 그는 항상 괜찮아!라고 화답했다. 걱정말라며, 나는 까다롭지 않다고. 찜닭 집에서는 불고기 양념도 있었다. 외국인 취향이네, 라며 그는 좋다고 웃었다. 실컷 내 공부에 대해 이야기하던 도중, 그는 눈을 마주치며, 너 성숙해진 것 같아, 라고 말했다. 얼굴이 빨개졌다.


나는 그에게 항상 궁금한 것이 많았다. 물론 그도 나도 쉴새없이 말했다. 그는 내 이야기를 잘 듣고, 들으면서는 내 눈을 분명히 보고 있었다. 같이 걸을 때면, 나는 종종 도로 위의 건물이나 주변 사람들에 대해 농담하려는 욕구가 들기도 했는데, 그는 그런 것들을 보지 않고 오직 대화에만 화답했다. 그날 이후 친구들에게, 요즘 주파수 맞는 사람이 제일 좋은 것 같아! 라고 자랑하고는 했었다. 말이 끊기지 않아, 나에게 집중하니까.


우린 그 시기에 연속해서 만났다. 그러니까, 날을 잡지 않았지만 내일 시간 괜찮아? 라고 물으면서 즉석으로 만났다. 물론 시간이 안 괜찮을리가, 나는 모든 일정을 비워놨었다. 홍대에 간 것도, 남산을 올라간 것도, 치킨집에 간 것도, 다 즉석으로 결정한 것이다. 매 일정이 끝나고, 돌아가는 때에 그는 항상 길게 너와 있어서 즐거웠다는 말을 보내고는 했었다.


우린 날이 좋으니 계속 걸었다. 청계천을 걷는 날도 있었다. 물구나무씨는 애인이 있지만 새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할거냐고 물었다. 말해야지! 뻔히 빙빙 돌리며 말하는 것을 보니 본인이 그런거다. 서핑하러 간 사이 좋아하는 사람이 새로 생겼단다. 누구지 묻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새로운 사람은 유학하는 사람으로, 아직 직업을 가지지 않은 학생이었다. 두 명을 좋아할 수도 있지 않냐고 말하는 그에게 나는 꽤 단호해졌다. 안돼, 그게 애인한테 예의는 아니잖아. 변한 내 말투에 그는 계속 이러면 어때? 저러면 어때라며 도덕적 딜레마를 들고 왔다. 애인이 너무 힘든 상황이라면? 애인이 그래도 가장 좋다면? 이런 저런 질문을 계속 하니, 내 경험을 이야기해주는 수 밖에 없었다. 정말 비슷한 경험이 있냐고 눈을 반짝이는 그에게, 친구의 경험을 섞어가며 환승연애의 썰을 풀어줬다. 나도 너랑 비슷했어. 평생 돌아다니고 싶다는 그의 욕망에 박수를 쳤으면서, 여기서는 그가 노선을 정하기를 바랬다. 그 사람이 나인 것 마냥.


떠나기 전 날, 맥주를 마시면서 그는 몇 년 전에도 너를 좋아했었어, 그리고 애인이 없었더라면 너랑 만났을 것 같아, 라고 말했다. 술기운으로 좀 더 의자에 기대서 편한 자세로 앉아서, 그는 과거의 기억들 속 관계의 모습을 꺼내 올렸다. 술기운이 올라왔고, 그는 그답지 않게 민망해했다. 나도 너를 좋아했었다고, 그렇게 답하면서 나는 그의 어장에 내가 있음이 좋았다. 하지만 과거형에 무엇을 말할 수 있었을까. 그 무엇도 진전되기 전에, 분위기가 뚝 끊긴 것은 집에 들어오지 않냐는 엄마의 전화였다. 마지막 날, 그래서 무엇을 시작할 수도 없었지만, 딱 그렇게 끝났다. 진로도, 연애도 잘 정해보기를 바란다고, 응원한다는 말을 하며 마지막 포옹을 하고 택시를 태웠다.


그가 떠나는 날, 잠이 오지 않았다. 5분마다 새로고침을 하며 DM을 보았고, 아쉬워하는 나에게 어디서든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말과 이모지는 오히려 아쉽다는 말을 더 하게끔 만들었다. 내가 진지하게 충고했지만, 꼭 연애 문제가 그렇게 딱 분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정하지 않고 흔들려도 된다고, 여러 번 말을 하는 내게, 그는 그럼에도 고맙다며 이별 인사를 남겼다. 그렇게 계속된 나의 DM에 대한 답장은 점점 더 느리게 왔고, 과거의 관계처럼 그저 인스스에 좋아요를 누르는 관계로 변해갔다. 그는 애인과 이별했다며, 그래서 힘들었다고도 말했지만, 그 이후엔 한 달 간격의 답장만이 오고는 했다.


삼킨 말들은 무엇이었을까. 난 나를 좋아했었다는 말을 한 그에게 수많은 답장글을 쓰기도 한다. 너가 날 좋아한다고 과거에 말해줬었으면 했어, 그 말 한 마디면 너가 애인이 있든 없든 중요하지 않았을 것 같거든. 너가 있는 곳으로 모든 것을 내던지고 떠났을 것 같다고. 나는 너처럼 자유롭게 곳곳을 돌아다니며 살고 싶었어, 너가 그런 사람이니까 나도 그럴 수 있었을 것 같거든.


난 여전히 요가 자세에서 물구나무는커녕 정수리를 아래로 놓는 자세는 도전하지도 못한다. 넘어져도 요가 매트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 뻔히 보이는데, 내 다리가 부러질 것 같고, 엄청난 고통이 밀려올 것 같다. 그렇지만 내 버킷리스트는 물구나무다.


누군가를 통해 내 인생이 바뀔 수 있을지 상상해보는 것은 적당히 해야 한다. 그렇지만 난 여전히 너, 물구나무를 통해 구원을 바라. 내가 할 수 없는 세계로 갈 수 있게 해줄 것 같아서, 아니 너를 통해 내가 완벽한 물구나무를 설 수 있을 것 같아서. 내 마음의 추구미로 남아있는 그가, 나를 선택해줬었으면 해서, 그래서 너가 되고 싶어서, 너의 선택으로 내가 한국에서의 짐을 벗어던지고 더 단단해질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수없이 너의 꿈을 꿔. 너는 영원히 나의 다른 인생을 대표하겠지, 물구나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