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 교사가 된 지 이십 년이 지났다. 어느새 나이도 마흔 중반을 넘어섰고 교사로서 살아온 시간보다 정년까지(명예퇴직을 하지 않는 한) 남아있는 시간이 더 적다. 해마다 3월이면 새로운 아이들을 만났고 그다음 해 2월이면 어김없이 일 년을 함께 보낸 아이들과 이별을 했다. 아이들과 함께 교실에서 지낼 때면 정말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고 언제든 또 만날 것 같지만 헤어지면 일부러 시간을 내지 않는 한 서로 한 번 보기 힘들었다. 나는 그동안 수없이 많은 아이들과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며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왜 하필 교사 2년 차에 만났던 두 아이를 떠올렸을까? 나는 그때 고작 아무것도 몰랐던 스무다섯 살이었을 뿐인데. 2000년,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이었다. 온통 밀레니엄을 외치며 우울과 기대로 혼란스러운 새로운 세기의 시간이었지만 그때 나는 그저 갓 발령받았던, 교사 생활 일 년을 해보고 조금 경험이 생긴 2년 차 교사였다.
4학년 3반을 맡았던 3월, 나는 첫 번째 아이 유미(가명)를 만났다. 유미는 조용하고 새침한 여자아이였고 키는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컸다. 얼굴이 동글동글한 귀여운 아이였다. 유미는 내게 와서 아버지가 새어머니와 재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뒤 5월 어느 날, 유미는 양쪽 볼을 심하게 맞아서 왔다. 아버지에게 연락을 했고 그 뒤 유미를 더 챙기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새어머니는 아버지가 안 계실 때는 유미를 많이 혼냈다. 6월에 새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새어머니와 유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지만 아무 답장이 없었다. 대신 유미가 편지를 써왔다.
공책 한 장을 찢어서 쓴 유미의 편지에는 휴일에 집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새어머니는 내 편지를 보고 어떻게 말했는지를 적어 놓았다. 거기에는 편지를 들고 가니 새어머니가 학교에서 네가 행동과 말을 어떻게 하면 이런 편지가 오느냐고 꾸지람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와 휴일에 아버지 없는 시간에 걸레 빨고 방 닦는 게 느리다고 새어머니에게 손바닥 맞은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어떤 날은 새어머니에게 머리를 맞아 유미가 머리가 어지럽다고 했다. 잘 때도 머리가 어지럽고 멍해서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했다. 새어머니는 5월 이후로 맞아도 표시가 안 나는 머리를 때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유미는 새어머니가 잘해준다고, 자기 걱정을 많이 한다고 말을 돌렸다. 처음 만났을 때 밝고 환했던 유미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고 살도 점점 빠졌다. 몇 달 사이 유미는 다른 아이처럼 변했가고 있었다.
그렇게 7월이 되었다. 유미의 부모님이 내게 전화를 해서 학교에 당분간 보낼 수 없다고 했다. 유미가 어딘가 부딪혀 상처를 입었는데 좀 가라앉으면 보내겠다고 했다. 나는 얼마나 큰 상처이면 학교에 못 보낼 정도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4일째 되는 날 유미와 평소 친하게 지냈던 아이들을 데리고 유미 집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마침 유미의 집에 새어머니가 안 계셔서 우리는 유미의 집에 들어가 유미를 만났다. 유미의 얼굴은 멍이 들어 있었는데 얼굴 전체에 넓게 멍이 퍼져 있었다. 그나마 삼일 정도 지나서 상처가 옅어지고 있었다. 유미는 방 안에서 넘어져 어디 부딪혔다고 말했지만 나는 누군가에게 맞았다고 확신했다.
그날 학교에 돌아가서 같은 학년 선생님들께 유미의 상황을 말하며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가끔 내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나는 유미를 어떻게든 구해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하지만 그 당시는 아동학대에 대해 지금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때였다. 각자 가정마다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던 때여서 가정 문제를 함부로 간섭하면 안 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유미를 두면 유미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저 유미를 구하고 싶었고 어떻게 새어머니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학대신고센터에 신고를 할 것을 결심했다. 누군가에게 말했다가 신고해야겠다는 계획이 틀어질까 봐 걱정되었다. 나의 목표는 오로지 유미를 살리는 것이었기에 꼭 신고를 해야만 했다.
유미의 부모님께 여름방학식 하는 날에는 유미를 꼭 학교에 보내달라고 했다. 유미는 멍을 가리기 위해 어린이용 선글라스와 선캡을 쓰고 학교에 왔다. 나는 그날, 유미에게 전화번호를 물어 유미의 숙모를 학교로 불렀다. 유미의 숙모는 아기를 업고 학교에 와 주었다. 숙모를 통해 유미를 친어머니에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유미를 살리는 방법이라고, 다시 집으로 보내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숙모는 유미를 데리고 자신의 집에 갔다. 그 뒤 학대신고센터에 유미의 부모님을 신고했다. 나는 유미에게 편지를 주며 집에 가지 말라고, 숙모 집에 안전하게 있으라고 말했다. 내 편지에는 그동안 유미에게 미안했던 마음과 앞으로는 꼭 보호해 주겠다는 마음을 적었다.
여름방학식날 숙모 댁에 갔던 유미는 다시 아버지를 따라 집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학대신고센터 관계자들이 경찰과 함께 유미의 집을 방문했고 유미는 방학까지 아동보호센터에서 보호를 받게 되었다. 유미의 멍이 많이 없어져서 신체적 학대에 대한 증거를 찾을 수 없었지만 정서적으로 많이 불안하고 힘들다는 검사 결과가 나왔다. 나는 그 사이, 유미의 집에 갔던 아이들과 경찰서에 가서 진술을 했다. 유미의 친엄마를 만나기도 했고 유미가 살던 동네의 사람을 만나 유미가 학대받은 정황을 알아보기도 했다. 나는 방학 동안 아동보호센터에 있는 유미에게 책을 사서 갖다 주기도 했다. 아동보호센터에서 유미는 훨씬 밝은 표정으로 지내고 있었는데 나에게 아동보호센터에 동갑내기 남자아이가 있다고 말했다. 그 남자아이 이름은 김동욱(가명)이었고 나는 스치듯이 아주 잠깐 노란 머리 남자아이와 마주쳤다. 그 아이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 두 번째 아이가 될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방학이 지나고 2학기가 되어 유미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유미의 부모님은 내가 신고한 것이 못마땅한 상황이었고 유미는 갑자기 전학을 갔다. 유미의 부모님은 전화를 통해 할머니 댁으로 유미가 전학을 갔다고 아주 짧고 차갑게 말했다. 유미의 책상 서랍과 사물함에 교과서와 물품들이 그대로 있었는데 유미는 모두 놔둔 채 그렇게 떠났다.
유미가 전학을 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한 남자아이가 우리 반으로 전학을 왔는데 그 아이가 바로 동욱이었다. 동욱이와 누나는 새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못했고 아버지는 견디지 못해 8살에 동욱이의 양육권을 포기했다. 동욱이는 그 뒤로 보육원에 있었으나 거의 떠돌이처럼 살았다. 정규 교육도 받지 못했고 돈이 필요하면 물건을 훔쳤다. 경찰에도 여러 차례 잡혔지만 그때뿐이었다. 그런 동욱이가 다시 교육을 받은 뒤 아버지에게 돌아왔다. 아버지는 다시 동욱이를 자식으로 받아들였는데 동욱이의 아버지가 사는 곳이 내가 근무하는 초등학교 근처였다. 그렇게 해서 동욱이는 아주 우연히 우리 반 학생이 되었다.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동욱이는 학교를 거의 오지 않은 채 다시 집을 뛰쳐나가고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어떤 때는 슈퍼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경찰에 붙잡혀서 내가 부모님 대신 경찰서에 데리러 가기도 했다. 12월의 어느 날, 그날도 동욱이는 집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느라 학교를 오지 않았다. 나는 햇살이 따뜻한 오후에 동욱이를 데리러 동욱이 집에 갔다. 동욱이에게 학교에 가자고 울면서 부탁을 했고 결국 동욱이는 마지못해 집을 나섰다. 나는 동욱이의 손을 잡고 학교에 오면서도 계속 울었다.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동욱이에게 마음속으로 말했다. 동욱아, 기억해야 해. 언젠가 네 손을 놓지 않은 선생님이 있었다는 걸. 나는 동욱이가 자기 손을 꼭 잡고 자신을 위해 울어 준 단 한 사람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길 바랬다. 외롭고 쓸쓸하게 떠돌아다녔던 동욱이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주고 싶었다. 동욱이는 내가 데리러 간 그날부터 겨울방학 전까지 학교를 꼬박 왔다. 물론 그 이듬해부터는 동욱이의 소식을 듣지는 못했다.
교사 2년 차에 내가 만났던 아이 둘, 유미와 동욱이. 내 기억 속 작은 꼬마 아이 둘은 올해 서른세 살이 되었을 것이다. 어디에 살든 건강하게, 그리고 어리고 미숙했지만 그들의 행복을 바랐던 선생님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며 살아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