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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사건] 1979년 10월 16일

부산-마산 민중항쟁으로 유신이 막을 내리다

by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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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칭 부마항쟁이라 부른다. 그리고, 조선시대 이래로 야권지역이었던 영남권이 김영삼을 필두로 하여 훗날 ‘우리가 남이가’로 지칭되는 TK, PK가 형성된 시점이며, 동시에 본격적인 민중항쟁의 시작점으로 본다. 물론, 그 전에 4.19가 있었긴 하지만 그 이후 민중항쟁은 박정희 독재철권 통치 하에서 제대로 발현된 적이 없었다. 4.19에서 부마항쟁까지 그 사이의 시간차가 너무나도 길었다.


* 우리가 착각들을 하는데 전라도는 본래가 여권지지기반이다. 백제 시절은 제외한다 하더라도 고려왕조는 전라도 인사를 많이 등용시켜 전라도=친고려 성향지역을 지니게 되었으며, 나아가 조선은 왕가 자체가 전주를 기반으로 삼는 왕조였다. 해방 이후 이승만, 박정희를 가장 많이 지지한 지역이 전라도였다. 즉, 대대로 여권지지성향을 지닌 지역이 전라도였다. 그러다가,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지면서 반여 친DJ로 노선이 바뀌게 된 것이다.


그 반면에 대대로 반여 성향은 경상도였다. 조선시대를 좌지우지 했던 정치세력들은 기호학파로서(경기, 충청) 영남학파는 선조-광해군 시기에 잠깐 권력을 잡았을 뿐 대대로 향반이나 잔반으로서 몰락한 양반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들은 세도가문 시기에 가장 많이 저항하였고, 전국적 민중봉기가 일어난 임술농민봉기도 진주에서 시작되었다. 고종의 개화정책을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반대한 세력이 영남이었다. 반여 성향의 영남이 친여 성향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이제부터 이야기할 부마항쟁을 그 시작점으로 하며 그 후 YS가 3당 합당을 하여 정권을 잡은 1992년부터 적극적인 친여지역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 윗 글에 반대하는 이들은 고려는 왕건의 훈요십조 운운하며 전라도 인사 등용을 하지 말라고 했다며 전라도 배제를 논하는데 차령이남 금강이북은 전라도가 아니라 충청도다

1978년 신민당 총재 선출 당시 김영삼(좌)과 이철승(우)

유신시절이던 70년대가 되면 박정희 정부는 한계에 부딪힌다. 일단 반유신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었고, 미국과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가고 있었으며, 2차 석유파동으로 자동차, 조선업을 위주로 수출위주 정책을 펼치던 경제는 바닥을 치면서 시민의 삶은 피폐해져만 갔다. 이러다보니 1978년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에게 처참하게 패배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리고, 신민당 총재에 온건파 이철승을 누르고 반박정희 정권의 투사로 급진파로 분류되던 김영삼이 선출되면서 박정희는 급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YH 무역사건이 터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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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 무역사건이란 가발공장이던 YH 무역이 직원들의 급여를 빼돌리고 회사를 폐업시킨 사건을 말한다. 이에 직공들이 공장에서 데모를 하자 사장이 경찰에 신고를 하고 경찰을 피해 도망친 곳이 바로 김영삼이 총재로 있던 신민당 당사였다. 그런데, 경찰은 당사까지 쳐들어가서 여공을 창문밖으로 던져버려 사망까지 하게 되는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한다. 여기에 분노한 김영삼은 뉴욕타임즈와 인터뷰에서 박정희를 비핀하며 대놓고 하야를 요구하는 듯한 발언을 하였고, 국회는 김영삼을 국가에 대한 모독이라며 그를 제명하기에 이른다.

반박정희 선봉투사이면서 부산과 영남의 아이콘이었던 김영삼이 국회에서 제명되자 가장 먼저 반발한 것은 당연히도 부산이었다. 특히 부산대학교였다. 원래는 10월 15일 부산대학교 도서관 앞에서 하기로 했는데 아무도 모이지 않자 지도부는 다시 모여 불특정 다수의 학생이 아닌 지정된 학생들만 하기로 하고 법정대, 민주동아리, 언더써클, 경상대 등과 함께 부산대학교 도서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때 구호 시위가 그 유명한 ‘유신철폐’, ‘독재타도’였다. 이날이 1979년 10월 16일이었다.


그런데, 전날까지 모이지도 않던 학생들이 시위가 시작되자 갑자기 불어나서 5천명에 이르렀고, 부산중심가로 행진이 나아가자 동아대학교 학생들이 합류하였다. 행진이 국제시장에 이르자 이때부터는 학생이 아닌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민중항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저녁에 이르면 이른바 도시 하층민들까지 모두 합세하게 되는데 이때부터는 지도부의 통제가 되지 않으면서 시위가 폭력적으로 바뀌어 도청, 방송국, 경찰서, 신문사에 돌을 던지거나 쳐들어가 때려부수는 등의 폭력시위가 되어버린다.

이렇게 되어버리자 박정희는 18일 부산에 특전사 2,000명을 투입하는데 도리어 이로인해서 이 시위가 부산을 넘어 마산까지 확대되어버리는 악수가 되어버린다. 그러자, 박정희는 더욱더 강경 대처하면서 육군 특전사 예하 제1공수특전여단과 제3공수특전여단, 해군 제1해병사단의 제7연대와 2연대의 일부 병력이 계엄군으로 투입이 된다.

시위가 그럼에도불구하고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자 박정희는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하고 차지철은 한술 더 떠서 캄보디아 킬링필드 예를 들며 300만을 죽여도 나라가 끄떡없는데 100-200만쯤이야 죽여도 된다며 부추긴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이가 있었으니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였다. 이들의 이런 대화를 들으면서 이대로 두면 안되겠다 여기고 차지철과 박정희를 궁정동 안가에서 쏴죽이니 그것이 10.26 사건이다. 부마항쟁이 일어나고 열흘만의 일이었다.


4.19 이후 이어졌어야 할 민주화 운동은 박정희 18년 독재 철권통치 하에서 그 명맥이 끊어졌다가 부마항쟁을 기점으로 하여 다시 활발히 활동하게 된다. 그 이후 5.18, 6월 민주항쟁 등으로 이어지며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향한 재 출발선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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