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대교 붕괴사고가 일어나다
성수대교는 건설될 당시, 트러스식 다리로 건설되었다. 하지만 트러스식 공법은 이음새가 잘못되면 무너지기 쉬운 공법이었다. 게다가 다리 밑 부분을 이루고 있는 트러스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으며, 사고 당시 연결 부분도 심하게 녹슬었을 뿐만 아니라 다리 위에 가해지는 압력을 분산시키는 이음새에도 결함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안정 시공인 이음새 핀 등의 세부 요소들을 정기적으로 점검해야 하는데, 이러한 안전점검 조치를 소홀히 하였다.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38분경에 제5·6번 교각 사이 상부 트러스 약 50m가 붕괴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사고부분을 달리던 승합차 1대와 승용차 2대는 현수 트러스와 함께 한강으로 추락했고, 붕괴되는 지점에 걸쳐 있던 승용차 2대는 물속으로 빠졌다. 지나가던 한성운수 소속 16번 시내버스는 통과 도중 뒷바퀴가 붕괴 지점에 걸쳐있다가 차체가 뒤집혀 추락한 후, 떨어진 상판에 박혀 찌그러지는 바람에 등교길의 학생들을 비롯한 승객들이 사고를 당하였다. 버스 추락으로 사망한 사람은 29명이다.
사고 차량 중 승합차에는 제49주년 경찰의 날을 맞아 우수 중대로 선정되어 표창을 받기 위해 본대로 가던 의경들이 타고 있었는데, 이들은 사고 발생후 전원 무사하여 헌신적으로 피해자들을 구조했다.
32명(남 16명, 여 16명)이 숨지고, 17명이 부상을 입어 총 49명의 사상자를 낸 사고였다. 이 사고는 해외에도 크게 보도되어 건설업계에 큰 타격을 입혔을 뿐만 아니라 국가 이미지도 크게 훼손되었다. 사망자 중에 무학여자고등학교 학생 8명과 무학여자중학교 학생 1명, 서울교육대학교 여대생 1명, 필리핀인 아델 아이다 등 외국인 1명이 포함 되어 있었으며, 이 중 서울교육대학교 여대생의 경우 사망 후 장기를 의대생 실습용으로 기증하였다.
내가 이날을 기억하는 건 당시 훈련소에 있었고, 마침 마지막 야간행군을 마치고 복귀하니 소대장님들이 집에 모두 연락을 해보라고 하여 알게 되었고, 우리 집은 성수동에 위치해 있지 않았고, 그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도 없었기에 무사함을 확인하였다
붕괴 이후 토목학계는 무너지지 않은 부분을 그대로 수리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의견을 냈으나, 시민들의 정서를 감안해 새로 건설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어 1995년 4월 26일부터 현대건설이 새로 건설하기 시작해, 1997년 7월 3일에 직선 차선만 완성되었으며 이후 확장공사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램프를 건설하지 못하였다.확장공사는 1998년 12월 31일 폭과 길이 확장공사 진입램프 신설을 하고 2004년 9월 최종 완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성수대교 붕괴 사고 여파로 인해 같은 트러스식 공법으로 시공된 당산철교도 안전 점검 후폭풍이 일게 되어 1997년 1월 1일부터 철거 및 재건설에 들어갔고, 1999년 11월 22일에 다시 개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