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멸망하다
당나라와의 오랜 전쟁으로 국토 전역이 시달린 고구려는 이미 북쪽과 남쪽 곳곳의 여러 성에서 도망하고 항복하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당나라의 계필하력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밖에 도착하고, 이세적의 휘하의 당의 대군이 도착했으며 이 때 연남생이 이끄는 당에 투항한 고구려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곧이어 신라군도 합류하여 당나라,신라의 연합군은 한 달이 넘도록 평양을 포위하였다. 마침내 보장왕은 연남산으로 하여금 수령 98명을 거느리고 성 밖으로 나가 백기를 들고 이 적에게 항복하게 하였다. 이세적은 예를 갖추어 접대하였다.
하지만 항복하려는 보장왕과 달리 대막리지 연남건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으며 성문을 닫고 수비하며 대항하였다. 연남건은 자주 군사를 성 밖으로 출동시켜 싸웠으나 그 때 마다 패배하였다. 연남건은 승려 신성(信誠)에게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신성은 소장 오사·고요묘 등과 함께 이세적에게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내응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5일 뒤에 신성이 성문을 열었다. 이세적은 군사를 풀어 성위에 올라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불을 지르게 하였다. 당나라군과 연남생의 투항한 고구려군, 그리고 신라군이 성안으로 쇄도하여 대격전이 벌어졌다. 연남생을 따라 당에 항복한 고구려군 중에 용맹이 뛰어난 고현도 최선봉에 서서 평양성에 난입하였으며 난전 중에 평양성 군주 술탈은 신라군과의 교전중에 전사하였다. 한편 대막리지 연남건은 스스로 칼을 들어 자신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마침내 당나라 군사가 보장왕과 연남건 등을 붙잡았다. 수뇌부가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던 고구려 병사들은 여전히 당나라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결국 고구려는 멸망하고 마니 이때가 668년 10월 31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