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볼세비키 10월 혁명으로 정권을 잡다
러시아 혁명 이전에 진행하고 있던 급속한 산업화 등 사회 경제적 변화에 따라 농업을 중심으로 한 전통 사회는 타격을 받고 흔들리는 한편, 의사, 변호사, 엔지니어, 샐러리맨 등 전문가 계층이나 교육을 받은 중산층이 러시아에서 부상하고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시민들이 힘을 얻고, 삶의 발전을 구한 것은 당연한 일로, 구체제 하에서 이러한 이들의 욕망이 혁명의 밑바탕이 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도 러시아 사회에 충격을 주어 혁명에 불을 당기는 외적 요인이었다. 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많은 전사자가 났고, 산업과 경제는 막다른 골목에 다달았으며, 시민들의 생활은 빈곤으로 허덕이고 있다.
이렇게 시민들의 분노는 위정자에게 향하였고, 제정을 전복하기 위해 1917년 2월 혁명으로 바뀌었다. 이후 임시 정부와 소비에트가 병립하는 이중 권력 상태가 탄생하여 혼란이 계속되었지만, 사람들은 다양한 정치 세력 속에서도 강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을 증명하고 러시아 사회의 변혁을 약속한 볼세비키에게 지지를 보냈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지만 러시아군의 군기는 혁명 전보다 오히려 더 소진해 있었던 상태였으며 1917년 9월 1일에 이르면 독일군의 공습을 받아 리가(오늘날 라트비아의 수도)가 함락되었고, 독일군이 국경까지 다다를 위기에 처해 있었던 상태였다. 아기에게 먹일 우유와 빵조차 모자라서 사람들의 불만도 극에 달해 있었다.
10월 23일 (그레고리력 11월 5일), 볼세비키 지도자의 한 사람인 얀 안벨트(Jaan Anvelt)는 혁명 이후 설립된 에스토니아 자치 정부의 수도 탈린에서 좌익 혁명 세력을 이끌고 무장 봉기를 하자, 이틑날 임시정부는 마지막 반격을 가하였고 이를 계기로 군사혁명위원회는 무력 행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적위대는 임시정부의 별 저항없이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페트로그라드의 인쇄소, 우체국, 발전소, 은행 등 요충지를 제압했고, 11월 7일에 '임시 정부'는 타도되었다. 국가 권력은 페트로그라드 노병 소비에트 기관이며, 페트로그라드의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와 수비군을 이끄는 군사혁명위원회로 옮겨졌다"고 선언했다. 피를 흘리지 않은 무혈혁명의 성공이었다.
10월 혁명의 공식적인 날짜는 겨울 궁전을 제외한 모든 정부 기관이 점령당한 당시 러시아가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으로 10월 25일이지만 그레고리력으로 11월 7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현재 전 세계가 사용하는 그레고리력에 따라 11월 혁명으로 불러야 하나 고유명사화되어 현재도 10월 혁명으로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