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 ‘아이다’를 초연하다
이집트의 왕이었던 이스마엘 파샤는 베르디의 열렬한 찬미자였던 지라, 이러한 역사적 순간을 베르디의 작품으로 경축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던 베르디는 이 요청을 단번에 거절한다.
이에 포기하지 않은 파샤는 베르디와 안면이 있었던 프랑스 오페라 코미코의 디렉터였던 카미유 뒤 로클을 통해 베르디를 설득시키려 하였고, 이집트에 있던 고고학자 오귀스트 마리에트를 중개자로 세웠다. 마리에트는 뒤 로클에게 베르디가 수락하지 않는다면, 구노와 바그너에게 맡길 수도 있고, 특히 바그너에게 '웅장한 것'을 기대할 수 있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고 로클은 이 편지에 마리에트가 생각해낸 줄거리를 베르디에게 보냈다. 이 시나리오는 베르디를 단번에 사로잡아 계약을 체결토록 하였고, 이에 베르디는 15만 프랑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받게 된다.
당시 오귀스트 마리에트의 시나리오를 베르디와 함께 작업했던 안토니오 기슬란초니가 다시 쓰고, 최고의 무대 효과를 위해 엄청난 재정이 뒷받침 되었다. 흔히들 수에즈 운하 개통 기념으로 초연된 오페라라고 알고 있으나, 물론 운하 개통을 기념하여 오페라를 만든건 맞지만, 바로 초연되지는 않았다. 수에즈 운하 개통시기는 1869년 11월 이며, 아이다가 초연된 시기는 1871년 12월 24일이다.
이후 두 달 후에 밀라노에서 유럽 초연이야말로 베르디가 모든 것을 진두지휘하여 대 성공을 거두며 세계의 오페라 극장을 정복하였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의 대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