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 첫 방송을 하다
실상 한국방송공사는 조선방송협회의 명목상 계승자이며, 북한의 조선중앙방송의 뿌리이기도 하다. 합천군 영상테마파크에 JODK 사옥을 재현해놓은듯한 건물이 있다.
이후 1935년 기존의 JODK는 경성중앙방송국으로 개칭하고 조선방송협회를 결성, 1936년부터 지역방송국 체제를 갖추었다. 개중에는 마산방송국처럼 간이방송소에서 시작한 곳도 있었고, 청진방송국의 경우 본격적으로 만주로 진군해오기 시작한 소련군에게 넘어가기 전에 관동군이 폭파시키고 철수하였다.
1945년 광복 후에는 미 군정청에 의하여 '중앙방송국'으로 개칭했다. 1947년 9월 3일에는 일본의 'JO'와 식민지 조선의 'JB'대신 우리나라 고유의 호출부호 'HL'을 받아 HLKA라는 약어를 사용하였다. KBS 창립 전까지는 라디오에서 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현재도 KBS 제1TV(CH 9)와 제1라디오(서울 97.3MHz) 계열의 콜사인은 H.L.K.A.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공보처 산하 기관으로 편입되었다.
그런데 라디오와 달리 텔레비전방송의 경우는 엄밀히 말해 KBS가 국내 최초는 아니다. 1956년 미국 TV수상기 메이커인 RCA가 출자한 'HLKZ-TV'(KORCAD-TV)가 시초이며, 당시로는 세계 최첨단을 달리던 RCA의 영상장비와 미국인 엔지니어까지 갖추어 기술적으로는 일본 못지않은 시스템을 짜놓았다.
그러나 경영난으로 인해 1957년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이 경영권을 인수했고, 이름도 DBC 대한방송으로 바꾼다.그러나 DBC는 1959년 방송국 아래층에 있던 가구점에서 원인 모를 불이 나버려 방송을 중단하고 말았다. 이후 한국일보측에서 놀고 있던 방송인력과 남은 장비는 당시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부가 인수받았다. 그리고 공보처가 있던 남산에 개국한 것이 현재의 KBS-1TV(당시에는 KBS-TV)인 것이다.
이후 KBS-TV는 개국 이래 <국가재건최고회의 소식>, <혁명의 아침>등 국정홍보성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군사정권의 선봉대 노릇을 했고, 1962년 1월 25일에 KBS-TV는 1기 탤런트를 공채하였다. 물론 국영방송사이다보니 소재가 교양적이거나 정권 계몽적인 아이디어를 많이 썼다.
1969년부터 일일연속극 <신부 1년생>을 편성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각 방송사별로 일일연속극 편성을 두고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KBS가 광고를 더 이상 안하게 되었다지만 시청률에 있어서 신경이 쓰이는 일은 어쩔수 없어서 윗선의 눈치를 보면서도 시청률 경쟁을 위해 일일연속극을 여러편 편성하기도 했고 그랬다.
국영방송이었던 KBS는 1972년 12월 '한국방송공사법' 제정 후 이듬해 문공부로부터 독립하여 공사화를 꾀하며 본격적인 공영방송 체제를 기획하며, 지금의 여의도 사옥 건설에 들어가 1976년에 여의도 시대를 개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