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안두희의 총에 맞아 사망하다
김구는 1876년 8월 29일 몰락 양반가의 후손으로 김방경의 25대손이며 본관은 구 안동,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몰락 양반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 이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한때 불교 승려로 활동했으며 자(字)는 연하(蓮下),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고, 호(號)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환속 이후의 이름인 두래(斗來), 피난 시기에 사용한 가명인 장진(張震), 장진구(張震球)도 있었다. 젊어서 동학교도 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圓宗)을 얻은 승려였으며, 신민회에서 활동하면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고,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계몽 운동 중 일본 제국 경찰에 연행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이 성과를 얻지 못하자 1921년 임시 정부 내 노선 갈등 이후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 정부를 이탈하고, 만주 사변 이후에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임시 정부를 옮겨다녔으며, 1924년에는 만주 대한통의부 박희광(朴喜光) 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 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고, 이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의 동경 의거,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사건 등을 지휘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 내무장, 재무장 등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 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1월부터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1949년 1월 한독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석상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을 희망한다고 발언하였다. 같은달 서울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세웠고, 3월 마포구 염리동에 창암학교를 세웠다. 한편 김구는 암살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제보를 접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도 살해하지 못했는데 동포가 어떻게 위해를 가하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김구는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총격당하였다. 곧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명동성모병원 원장 박병래는 정모 수녀 등 몇몇 간호수녀들을 대동하고 경교장으로 찾아가 천주교 예식대로 세례를 주었고 베드로 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생전에 성모병원에 입원하였고 당시 수녀들의 권고로 언제든 천주교에 입교할 것을 언약하였다. 며느리인 안미생의 권고도 있었다 한다. 6월 26일 사망하자 성모병원 간호수녀들이 시신을 염하였다.
안두희가 한국전쟁 이후 사면을 받고 군납업체를 운영했기 때문에 권력층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만 될 뿐,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일설에는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장은산 포병사령관, 김창룡 소령, 김병삼 대위, 김태선 서울시 경찰국장, 김성주 서북청년단 부단장, 정치브로커 김지웅 등이 가담하고, 홍종만, 안두희 등이 하수인이었다는 견해가 있으나 배후는 미궁이다.
독립된 나라에서 통일을 보지 못한 채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