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위장 해양조사선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납치되다
1968년 1월 23일 북한 원산 앞 공해 상에서 해양 조사선으로 위장한 미군의 정찰함 푸에블로 호가 나포되었다. 푸에블로 호는 일본 큐슈에서 출발해 소련의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다. 소련의 극동 기지를 정찰한 뒤 북한의 동해안에서 정보를 수집할 목적이었다. 하지만 1월 23일 정오경 원산앞바다에서 1척의 북한의 초계정으로부터 무전으로 “국적을 밝히라”는 요구를 받고 “미국 소속”이라고 답변했다. 이에 북한 함정은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위협해 왔고, 미 해군은 “공해 상에 있다”는 답전으로 이를 거절하였다. 약 1시간 후 북한 함정의 지원을 받고 3척의 무장 초계정과 2대의 미그기가 도착하여 포위하였다.
북한 미그기들이 주변을 선회하고 있는 동안 한 척의 북한 초계정이 접근하였으며 무장군인들이 푸에블로 호에 승선하였다. 이 과정에서 도망을 시도하다가 3명이 부상당하고 1명이 피살된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즉각 미국은 일본에서 월남으로 항해중인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호와 3척의 구축함을 진로를 변경시켜 원산만 부근에서 대기토록 하였으며, 25일에는 해공군의 예비역 14,000여 명에게 긴급 동원령을 내리고, 전투기를 비롯한 항공기 372대에 대한 출동태세를 갖추도록 했으며, 오산과 군산기지에 2개 전투기대대를 급파하는 등 군사적 조치를 위해 나갔다.
28일에는 추가로 2척의 항공모함과 구축함 1척 및 6척의 잠수함을 동해로 이동시킴으로써 한반도에는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소련을 통한 외교교섭이 소련의 거부로 실패하자, 미국 측은 한국정부의 반발을 무릅쓴 채 2월 2일부터 판문점에서 북한당국과의 비밀협상에 들어갔다.
그 결과 미국은 박정희 정부의 방기 우려, 북한의 강경한 자세 그리고 미국의 연루 우려라는 3중 제약 속에서 전례 없는 기묘한 타협을 이끌어냈다. 나아가 밴스 특사의 방한 이후 존슨 행정부 내에서 북한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는 점은 미국의 대북인식 변화를 보여주는 또 다른 근거가 되는 사건이 되었다.
미국의 대북인식이 바뀐 계기가 바로 1968년 1월 23일에 일어난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