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족의 영웅 악비, 살해당하다
송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군대가 화북(華北) 지방을 침입하자 이에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후퇴했고, 금나라가 화북을 점령하고 북송의 수도인 개봉을 점령하자 남하할수밖에 없엇다.
악비가 이끄는 군대는 싸움에서는 반드시 이기고, 백성들에게는 결코 폐를 끼치는 일이 없어 마을에 들어설 때마다 백성들이 앞다투어 술과 고기를 바칠 정도였다고 한다. 이 군단은 '악비가 이끄는 군대' 라는 뜻의 '악가군'이라 불리며 남송 제일의 최정예 군단으로 꼽혔다.
남송 조정에서는 재상인 진회(秦檜)가 금나라와 화평론(和平論)을 주장하였으며 연일 승전보를 알려오는 악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주전파(主戰派)인 군벌들과 이상파(理想派)의 관료들 사이에 분쟁이 지속되었고, 1141년 금나라와 강화를 주장하였던 재상 진회는 군벌끼리의 불화를 틈타서 그들의 군대 지휘권을 박탈하고 소속 병사들을 모두 중앙군으로 개편하였다.
1141년 조정의 군제 개편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악비는 무고한 누명을 쓰고 양자 악운과 악가군의 최고 간부인 장헌과 함께 투옥된 뒤 살해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정치적인 이유에서 주살당한 악비는 1178년에 복권되어, 1204년 악왕에 추대되게 되어 시후 근처에 악왕묘(岳王廟)가 건립되었다. 악비의 등에는 그의 어머니에 의해 진충보국(盡忠報國)이라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는데, 악왕묘에도 진충보국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1914년 이후에는 관우(關羽)와 함께 무묘(武廟)에 합사(合祀)되었다.
그는 송나라에 대한 절개를 지키다 죽어 간 문천상과 더불어 송나라의 2대 충신이자 제갈량과 함께 충절의 상징이요, 관우와 함께 무신으로 격상되었다. 명나라에 의해 중원이 수복된 이후 문천상, 악비, 제갈량에 대한 숭배를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해 왔다.
하지만 한족이 아니라 중국과 역사를 같이하는 모든 민족을 끌어안으려는 중국의 역사 공정에 의해 다시 평가절하되고 있다. 일단 악비의 군공 대부분이 그의 후손이 쓴 편지에 의거한 것이며, 대부분 과장되고 부풀려 졌다는 평가가 많다.
또한 이미 수복이 어려워진 전쟁을 더욱 질질 끌고 남송 조정에 자금과 군량미를 계속 요구 했다는 점에서 백성의 생활을 더 피폐해지게 했다는 평가도 있다.
남송의 재상 진회에 의한 음해와 모략으로 옥에서 살해당한 악비의 날짜가 1142년 1월 27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