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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오늘사건] 1951년 2월 13일

6.25 향방을 바꾼 지평리 전투가 발발하다

by 나그네

1950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1.4 후퇴와 장진호 전투로 대표되는 참담한 후퇴를 겪어야 했던 유엔군은 평택-원주-삼척 선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1951년 2월부터 반격에 들어갔다. 선더볼트 작전, 라운드업 작전, 킬러 작전, 리퍼 작전, 러기드 작전 그리고 돈틀리스 작전 등으로 진행된 반격 작전은 이전과 달리 산악 지형을 이용한 중국군의 우회 및 포위 섬멸 전술을 염두에 두고 종방향으로 진격이 아닌 횡방향의 연결을 중요시하여 한 번에 최대한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인접 부대의 진격 속도에 맞추어 모든 전선에서 천천히 진격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중국군은 유엔군이 울프하운드 작전과 썬더볼트 작전으로 한강을 회복하고, 다시 라운드업 작전을 개시하자 횡성군과 홍천군 사이 삼마치 고개 및 지평리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중국군은 지평리에 주둔하고 있던 유엔군을 몰아낸 다음 남한강을 도하하여 서울 남쪽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지평리의 23연대 전투단은 미국 2 보병사단 23연대와 23연대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를 주축으로 미국 37포병대대, 미국 82방공포대대 B포대, 미국 503포병대대 B포대가 연대전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중국은 이 지평리에 39군 예하 3개 사단을 투입했다. 좌우 인접 부대가 모두 철수하는 바람에 고립 상태가 된 23연대전투단의 철수를 미국 10군단이 8군 사령부에 요청했으나, 매슈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은 진지 사수를 명령했다. 23연대전투단은 1.6km 길이의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했으며, 북쪽에 1대대, 동쪽 3대대, 남쪽 2대대, 서쪽 프랑스 대대를 배치하여 전투에 대비했다.


지평리 동쪽에서 국군 5 사단 및 8사단을 붕괴시킨 중국군의 4차 공세는 결국 지평리에서 23연대 및 프랑스 대대의 치열한 저항과 후방의 화력 지원, 그리고 중국군 자체의 문제로 인해 결국 중국군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물러서게 되었다. 중국군의 주요 패배 원인은 화력의 열세, 지휘 체계 부재등으로 인함이었다.

1950년 말의 연이은 패배로 떨어졌던 유엔군의 사기가 다시 고무되었으며, 중국군의 인해전술을 화력과 견고한 방어진지로 물리친 최초의 전투가 되었다. 이후 자신감을 되찾은 유엔군은 다시 북진을 재개할 수 있었다.


1.4후퇴 이후 인해전술에 밀리기만 하던 한국전쟁은 중국의 인해전술에 대응할 방안을 모색하게 되고 반격을 도모하게 된 지평리 전투가 발발한 날이 1951년 2월 13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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