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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오늘사건] 1637년 2월 24일

인조,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하다

by 나그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는 광해군의 중립외교와는 다르게 친명정책을 펼쳐 청의 반발을 샀다. 이 무렵 국세가 날로 강대해지고 있었던 후금은 후방 안정을 꾀하고 악화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1627년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침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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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가고, 인조 이하 조정의 신하들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최명길의 강화 주장을 받아들여 양국의 대표가 회맹(會盟), 형제의 의를 약속하는 정묘화약(丁卯和約)을 맺었다.

인조가 59일간 버티며 항전했던 남한산성 행궁

1636년 12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었는데 청나라는 조선을 완전히 복속시키기 위해 병자호란을 일으켰다.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를 막지 못했고 봉림대군·인평대군과 비빈을 강화도로, 인조 본인은 남한산성으로 후퇴하여 항거했다.


1636년(인조 14) 인조는 청나라 군대를 되돌아가게 하고자 왕자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겠다고 했다. 그러나 인조는 능봉수 이이를 능봉군으로 봉하고 왕제라고 속여서 청나라에 보내고 화의를 체결했다. 청나라 군대는 일부 퇴각하던중 이이의 정체를 알게되고 퇴각을 중단하고 계속 조선 왕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결국 59일간을 버티던 인조는 항복을 결심했다. 성문을 나선 임금이 눈밖에 쌓인 비탈길을 내려와 수향단에 좌정한 홍타이지(숭덕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세 번 절 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찧는 의식이다. 이것도 청나라가 많이 봐준 것이었다.

03_1.jpg 인조가 항복을 한 곳에 세워진 송파구 석촌호수에 있는 삼전도비 (정확한 위치는 아니고 이전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반합(飯哈)을 요구했다. 반합은 장례를 치를 때 염하는 의식에서 차용한 방법으로 '임금의 두 손을 묶은 다음 죽은 사람처럼 구슬을 입에 물고 빈 관과 함께 나와 항복하라'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흔히 쓰이던 항복의식이었다. 하지만, 삼배구고두례로 허용하는 것으로 한 것이다.


임금이 오랑캐에게 무릎꿇고 절하는 모습을 지켜본 백관들과 유신들은 충격을 받았다. 소중화를 자처하며 명나라의 멸망 이후 중화의 도를 계승하였으며, 여진족, 거란족, 왜인, 유구인, 월남인 등을 야만인으로 간주하던 조선의 사대부와 지식인들은 엄청난 정신적 공황과 충격에 사로잡히게 된다.


한국사에서 치욕적인 삼전도의 굴욕이 벌어진 날이 1637년 2월 24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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