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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오늘사건] 1707년 3월 3일

무굴제국의 영광이자 쇠퇴의 시작 아우랑제브 졸하다

by 나그네 Mar 0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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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랑제브는 일찍부터 군사와 통치에 자질을 보여, 맏형인 다라시코와 대적하게 되었다. 권력 투쟁에서 아우랑제브는 군사적인 재능을 보여주었고 1658년 5월 사무가르에서 다라시코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키고 승리자가 된 뒤, 아버지는 아버지가 세운 아그라 궁에 유폐시키고, 다라시코까지 죽여버린 후에야 황제로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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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한 성격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워 했지만, 그의 정열과 능력 때문에 존경 하기도 했다. 그러나 1680년 이후부터 아우랑제브는 통치 태도와 정책을 바꿨다. 그가 이슬람만을 위한 통치자로 변신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 힌두교도들은 동료가 아니라 종속자가 되었다. 


이러한 정책의 변화는 악바르(악바르대제라 불리우는 악바르 1세)가 폐지했던 인두세(지즈야)가 1679년부터 비(非)이슬람교도들에게 다시 부과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렇게 되자 아우랑제브의 넷째 아들 악바르(무함마드 악바르)는 아버지를 배신하였고, 힌두교도들 역시 제국을 섬기기는 했지만 예전만큼 열성적이지는 않게 되었다. 


이처럼 아우랑제브는 부친과 형제들뿐만 아니라 자식들과도 사이가 안 좋았는데, 장남은 적국의 공주와 결혼하여 부친과 싸우다가 패하여 감옥에서 죽었고, 차남은 4번이나 반란을 했다가 결국 아우랑제브가 죽고나서는 자신의 형제들을 모조리 죽이고 황제로 즉위하니 그가 무아잠이다. 큰 딸 또한 부친과 사이가 좋지 않아 무함마드 악바르를 지지했다가 감옥에 갇혀서 옥사하고 말았다. 무아잠에게 안 죽은 형제는 악바르뿐이었는데 그는 부친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페르시아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죽었다. 


또한 아우랑제브는 남부 지역으로 떠났기 때문에 북부지역을 이전처럼 강력하게 통제할 수 없었다. 게다가 토지 세입의 일부를 할당받는 무굴 제국의 관리들이 세금을 과도하게 부과했기 때문에 통치력의 약화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농민의 불만은 펀자브 지방의 사트남파와 시크교도의 경우 같은 종교운동 형태나 자트족의 반란 등의 봉기를 불러 일으켰다. 이에 1675년 아우랑제브는 이슬람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시크교 구루(정신적 지도자) 테그 바하두르를 잡아들여 처형했다. 이후, 후계 구루들은 아우랑제브의 나머지 치세 동안 공개적으로 저항을 계속했다. 


그는 호전적인 정통 수니파 이슬람교도로서 통치했고 무흐타시브라고 불린 도덕 검열관들에 의해 강요되는 엄격한 법령들을 점차 시행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주화에 새겨진 모든 이슬람교 신앙고백 구절은 이교도의 모독을 방지하기 위하여 제거했고 조정의 신하들에게는 힌두식 인사법을 금지했으며 힌두교의 우상·사원·성지는 마구 파괴되었다. 


거의 49년간 통치한 뒤 아우랑제브가 죽었을 때, 제국은 수많은 치명적인 문제에 직면해 빈사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가 일으켰던 마라타 소탕작전은 제국의 재원을 지속적으로 고갈시켰고 시크교도와 자트족의 호전성은 제국 북부에 어두운 전조를 드리웠다. 또한 새로운 이슬람 정책은 힌두교도의 감정을 손상시켰고 라지푸트족의 지지를 잃게 만들었다. 게다가 토지에 대한 재정적인 압박은 전체 행정체계를 왜곡했다. 결국 그의 후계자들이 이러한 문제에 대처하지 못하자 제국은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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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제국의 최대 영토, 최대 전성기를 이룬 아우랑제브가 세상을 떠난 날이 1707년 3월 3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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