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변절자의 대명사. 천재 춘원 이광수 태어나다
이광수야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을 발표하고, 2.8 독립선언서를 쓰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로 변절한 것이야 모두들 다 아는 이야기일터이니 이는 배제하고 모르는 이야기들을 하도록 해볼까한다.
-. 그는 소년 인권에 관심이 많았다. 소파 방정환과도 친밀감이 있었으며 그는 평생토록 어느 누구에게도 어리다고 반말을 하지 않았으며, 평생 존대를 했다.
-. 자유연애주의자로 첫부인 백혜숙과 사랑없는 중매결혼을 한 것에 스스로 인정않고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 와세다대 유학시절 의과대학 다니던 허영숙과 연애를 하던 중에 나혜석과 동시에 연애를 한다. 쉽게 말해 불륜 바람둥이. 나혜석이 자신과 같은 자유연애주의자임에 기뻐하여 나혜석과 결혼을 꿈꿨으나 허영숙과 연애중임을 안 그녀의 오빠가 강하게 반발하여 무산되고 만다. 나혜석은 훗날 파리에서 삼일운동 지도자 33인 중 한명이며 변절하는 최린과 연애하게 되고 그로인해 남편과 이혼을 하나 나혜석의 자유연애주의에 불안감을 느낀 최린은 그녀와 결혼을 포기하고 이에 나혜석은 최린을 정조유린죄로 고소한다. 물론 패소하지만.
-. 단재 신채호의 영어 선생을 하기도 했다. 본래 김규식이 영어 선생이었는데 (당대 영어로는 넘버원이 김규식이었다) 신채호는 Sometime를 소메티메로 읽고, I am a boy를 I는 am a boy하여슬람. 이라고 읽으니 이에 빡친 김규식이 영어선생 자리를 때려치웠는데 신채호가 ‘발음은 필요없고 뜻만 알려주면 된다’며 김규식을 붙잡는 통에 김규식이 일본 시절 친하게 지냈던 이광수를 소개시켜줬다.
-. 그는 수익이었던 원고료 등으로 신한청년당, 임시정부 등에 적극적으로 재정적 지원을 하였으나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그가 재정적으로 곤경에 처하자 임시정부 역시 함께 곤란에 처하였다. 그 정도로 임정에 대한 그의 경제적 지원은 매우 컸다.
-. 그의 변절의 시작이라고 보는 ‘개벽’에 실린 민족개조론에서 그가 본 조선민족성은 ‘허위되고 공상과 공론만 즐겨 나태하고 서로 신의와 충성이 없고, 일에 임하여 용기가 없고, 빈궁하고’ 등으로 보았다.
-. 그는 인생 롤모델이 도산 안창호 선생이었다. 그는 안창호가 구속되었을 때 그를 구명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타협적 민족주의(자치론)을 주장은 하였을뿐 적극적으로 친일행위를 하지 않던 시기라 조선총독부에 연줄이 없어 그의 노력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 '민족정 경륜'을 발표하긴 했지만 그는 동아일보에 ‘단종애사’를 연재하면서 단종을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받는 백성으로, 사육신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한명회, 신숙주를 친일파 관료로, 수양대군을 일본 천황으로 묘사하는 등 ‘민족적 경륜’을 발표한 것이 바로 변절을 한 것은 아니었다.
-. 그는 한반도에서 열린 최초의 미스코리아 대회의 심사위원을 맡았다.
-. 이순신 가문이 가난하게 사는 것에 분개하여 그들을 돕고자 쓴 소설이 ‘이순신전’이고, 여기에 더하여 그는 당시 갑부였던 윤치호(당시 친일파)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그들을 금전적으로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윤치호는 이광수의 청으로 이순신 가문을 재정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이순신전’ 원고료는 모두 이순신 가문에 모두 전달하였다.
-. 해방 이후 이광수는 ‘도산 안창호’ 평전을 썼으며,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의 윤문(글을 매끄럽게 다듬는 일) 작업에 참여하였다. 우리가 읽고 있는 백범일지는 이광수의 윤문으로 된 글을 읽고 있는 것이다. 이는 김구가 직접 이광수에게 요청한 것이다.
-. 이광수는 해방 이후 ‘자열서’를 통하여 자신의 친일을 반성하고 잘못을 고한 최남선과는 다르게 ‘나의 고백’, ‘친일파의 변’을 통하여 자신의 친일은 민족을 위한 것이라는 궤변을 일삼았으며, 이는 훗날 반민특위에 잡혔을 때도 동일하였다. 그는 조선총독부가 조선인 38,000명의 명단을 보여주며 친일을 안 하면 이들을 다 죽이겠다고 하여 민족을 위해 했다는 말도 하기도 했다. 그 명단은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 문단의 거두 박태원을 발굴한 것이 이광수이고, 소학교에 다니던 어린 아이의 글을 보고 너는 명문가가 되겠다하여 그를 적극 지원했는데 그 아이가 피천득이었고, 시 창작대회에서 한 참가자가 자신의 시가 마음에 들지 않아 휴지통에 버리고 대회 불참을 하려고 할때 휴지통에서 그의 시를 보고 넌 시인이 되겠다하여 그를 시단으로 끌어 들였는데 그가 바로 김영랑이었다.
-. 한민족은 단일 민족이라고 처음 이야기하였다. 이는 일본이 내세웠던 내선일체에 쉽게 융화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광수 전까지 기본적 상식은 다민족, 다종족 국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