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가 창간되다
지금의 조선일보는 어느 서베이 조사에서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불신하는 신문 1위에 오른 신문이며, 중앙일보, 동아일보와 함께 극우보수 신문이다.
조선일보는 1920년에 창립하였으며 일본의 소위 문화정치가 실시되면서 동아일보와 함께 조선총독부로부터 허가되었다. 창간 당시에는 대정친목회(송병준, 이완용, 민영휘 등이 속한 것을 보면 단체 성격은 뻔하다)를 모체로 조진태 사장으로 그 역사가 시작한다. 그러나 영친왕과 일본 왕족인 마사코(이방자)와의 강제결혼을 비판하는 기사로 인해 압수당했고 대정실업친목회가 약속했던 자본금 불입을 하지 못해서 대정실업친목회 부회장이었던 초대 사장 조진태가 물러나고 변호사 출신 2대 사장 유문환이 취임했다.
같은 해 8월 27일에는 방한한 미국 의원단을 환영하는 조선인들을 일본 경찰이 부당하게 탄압했다고 비판한 논설을 실어서 1주간 정간을 당했다. 같은 해 9월 5일자에 실린 "당국의 소위 문화 통치는 奇怪(기괴)치 아니한가" 라는 논설로 인해 무기 정간을 당했다. 이러한 끊임없는 정간과 일제의 탄압을 당하면서 자금난에 시달리게 되고 결국 1921년 4월 8일 판권을 인수한 친일관료 송병준은 자신이 신문경영 전면에 나서지 않고 원로 언론인 남궁훈을 조선일보 3대 사장으로 영입한다. 하지만, 친일 갑부 송병준이 대놓고 전면에 나서지 않은데다가 남궁훈 또한 민족 독립운동가로써 송병준에게 놀아나지 않자 송병준은 자금을 끊어버리고 이에 조선일보는 다시 자금난에 허덕이게 된다.
1924년 9월 13일에 신석우가 만석꾼 부친을 설득하여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는 반일 민족주의 신문으로 변화하여 4대 사장으로 민족의 사표인 월남 이상재 선생을 사장으로 취임시킨다.
이상재 선쟁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일보는 신간회 결성을 주도하고 문자보급운동의 일환으로 한글 교재를 무상 배포하는 등 문화보전에 힘썼다. 조선일보를 인수한 신석우는 우리가 현재 쓰는 국명인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을 국명으로 제안한 인물이다.
이때는 일제와 타협적이던 동아일보와는 달리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성향을 띄었다. 좌파와 우파가 연합한 최대 독립운동조직 신간회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으며, 홍명희와 박헌영,김단야 등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조선일보에 입사하면서 사회주의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 당시에 조선일보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실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장려하기도 하였다. 월남 이상재 선생이 작고하고 나서 5대는 신석우가 맡았다가, 다시 조선일보 주필이자 발행인인 안재홍이 6대 사장에 취임한다. 조선일보는 계속적인 민족독립운동가들로 인하여 민족 정론지로서의 가치를 드높였다.
하지만, 1932년 조선일보가 모금한 '재만 조선인 동포를 위한 의연금'을 안재홍이 착복했다는 명분으로 일제에 의해 구속된다. 이후, 안재홍은 출옥과 구속을 수시로 반복하며 일제강점기 시절 가장 많이 구속된 언론인으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군관학교사건, 흥업구락부사건, 조선어학회 사건이 대표적인 예이다.
조선일보 사장이 구속과 출옥이 계속되어 사장직 공석이 반복되자 그 후 7대 사장 유진태를 거쳐 8대 사장에 고당 조만식이 취임한다. 조만식 선생이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한데에는 숭실학교 후배인 조병옥의 힘이 컸다. 조병옥이 일제에 의해 구속되었다가 출감하였는데 이때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가 그에게 사장을 맡아 달라하였고 이에 조병옥은 조만식에게 사장을 맡아 달라 요청하여 이뤄진 일이다.
조만식은 조선총독부로부터 신사참배와 지원병제도를 협조하라는 요청이 왔으나 모두 거부하였다. 하지만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온데다 경성부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한 조만식은 1933년 경영난 악화로 신문사 운영이 힘들어지자 당시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있던 광산업으로 벼락부자가 된 방응모에게 경영권을 넘긴다.
조선일보는 방응모가 인수한 이후로 친일신문으로 적극 변절하였고, 그 모습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밤의 대통령’으로 대한민국 정,재,검, 경,언론계를 지들 멋대로 농단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