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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오늘사건] 1960년 3월 15일

역대 이런 선거는 없었다. 3.15 부정선거!!!

by 나그네 Mar 1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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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이승만의 인기는 아주 높았다. 임시정부의 상징, 독립운동의 아버지라 불린 김구 선생과 붙은 1대 대선에서는 그야말로 91.84% 대 6.63%라는 말도 안되는 압도적인 득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이러한 전국적인 이승만의 인기에 힘입어 자연스럽게 자유당의 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잡게 된다. 권력에 야욕을 보인 자유당 당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계속 누리고자 한다. 건국 초기에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은 두 번까지 할 수 있으나 자유당은 자신들의 권력을 누리기 위해서 헌법을 바꾸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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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을 바꾸기 위해서는 2/3 이상의 표를 얻어야 했는데, 이 때 총 203표가 있었고, 2/3는 135.33... 이다. 실제로 135표가 나왔지만 사람을 소수로 나눌 수 없고, 2/3 이상이므로 135표이면 통과다 라는 사사오입 개헌을 주장하여, 어거지로 헌법을 바꾸게 된다. 사사오입 개헌에 동원된 인물이 서울대학교 수학과 교수이자 초대 대한수학회장을 맡았고, 사사오입 개헌 이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문교부 고시위원을 지낸 최윤식 교수이다.


자유당 후보에는 이승만(대통령)과 이기붕(부통령)이 나오고, 민주당에서는 조병옥(대통령)과 장면(부통령)이 나왔다. 조병옥에게는 지병이 있어 선거 전 사망하게 되어 대통령 후보에는 이승만이 단독 후보가 되었다.


그동안 자유당은 민주당과 대결해야만 했지만 민주당 대선 후보가 갑자기 죽었으니,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 결국 자유당은 이 틈을 노리게 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운다. 


정부로 하여금 공무원을 통한 선거 운동망을 조직한다.

전국 경찰에 지시하여 이를 감시, 독찰하도록 한다.

정치 깡패를 동원한다.

공개 투표를 계획한다.

완장 부대를 활용한다.

투표가 시작되기 전에는 자유당에 한 표를 던진 가짜 투표용지를 무더기로 집어 넣는다.

야당 참관인은 투표하는 장소에서 추방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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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에는 경찰이 가담하였다. 그러자 몇몇 유권자들이 "경찰이 수사는커녕 오히려 폭력을 조장하고 있다" 라고 호소하였지만, 깡패들이 "사실을 해명하라"고 소동을 일으켰다. 또한, 3월 9일과 10일에는 전라남도 여수와 광산에서 민주당 간부가 구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민주당은 이에 대해 '부정선거 거부운동에 참여해 줄 것'을 호소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선거일이 가까워지자 이들은 위에서 짠 계획들을 적용하기로 했다. 선거 전날인 3월 14일 자유당은 모든 선거함에 이승만과 이기붕이 찍혀 있는 위조 투표지를 무더기로 집어넣었다.


3월 15일 드디어 선거가 치러졌다. 이들은 투표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가 하면, 한 명 당 투표 용지를 20장까지 가져가는 등의 선거 조작 행위를 저질렀다. 또한 자유당 당원들이 기표소까지 들어가 자유당을 뽑는 지 아니면 야당을 뽑는지 감시하는가 하면 야당 선거 관리인을 투표소에서 쫓아내는 행위까지 저질렀다. 


이러한 부정 행위에는 자유당 소속 정치깡패들이 동원되었고 그 밖에도 내무부 소속의 공무원들까지 조직적으로 개입하였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민주당은 오후 4시 30분에 언론에 담화를 발표하였으며, "3·15 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선거의 이름 하에 이루어진 국민주권에 대한 포악한 강도 행위"라고 규정하고 불법, 무효임을 선언했다. 이에 부정선거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날 오후 늦게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발생하였다.


한편 선거가 종료된 뒤 개표를 시작했다. 그런데 개표 중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득표율이 100%에 육박하는 결과가 나오자 국무위원들은 자유당 후보가 95% 또는 97%를 넘어 갈 것을 우려하였고, 이렇게 되면 부정선거임이 들통 날까봐 "걱정"을 하였다. 그러자 최인규·이강학 등은 경비전화를 통해 "이승만은 80%로, 이기붕은 70~75% 선으로 조정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렇게 온갖 부정이 치러진 결과 46.4%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민주당의 장면 후보는 17.5%로 뚝 떨어지고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는 79.2%의 기록적 상승세를 보여서 당선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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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미 부정 선거라는 사실이 들통 났고, 선거 이튿날인 1960년 3월 16일 옛 광양 등지에서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시위가 발생하였다.  한편 일부 지방에서는 투표함을 확인하던 중 투표자 수가 유권자 수보다 많은 경우가 발견되자 급기야 투표함을 불에 태우는 일까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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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가 지속되자 정부는 계엄령까지 선포하여 시위를 진압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시위를 일으켰다. 그러나 정부는 "공산주의 세력이 개입했다"는 말을 꺼내며 폭력적인 진압을 강행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한편 학생들까지 시위를 일으키자 이들도 죽어나갔고, 서울에서도 심심찮게 데모가 일어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귀가하는 도중에, 정치 깡패들이 그들을 덮쳐 학생 2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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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이승만은 인기가 땅에 곤두박질 치는 등 그야말로 몰락했다. 1960년 4월, 옛 광양 앞바다에서 실종되었던 학생 김주열이 최루탄이 눈이 박힌 주검으로 발견되자 시위는 격화되었으며, 이는 4.19 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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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끝에 이승만은 대통령 선거를 다시 치르기로 약속했으며 얼마 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본인의 젊은 시절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서 활동했던 하와이로 갔다. 

단상에 있는 인물이 윤보선 대통령, 단상 우측에 있는 인물이 장면 종리단상에 있는 인물이 윤보선 대통령, 단상 우측에 있는 인물이 장면 종리

4월 28일, 제1공화국은 결국 붕괴되었으며 대신에 내각책임제를 바탕으로 하는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그 뒤, 국민들은 총선을 통해 민주당을 집권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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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년도 채 못 가 전국 규모의 군사 쿠데타로 무너지고야 만다. 한편, 이승만은 제3공화국이 출범하고도 귀국하지 못한 채, 1965년 미국에서 91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귀국하지 못한 이유는 박정희 대통령이 외교관을 보내어 오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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