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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그네 Jul 06. 2024

[역사속의오늘사건] 1599년 7월 6일

임진왜란의 영웅 권율 장군 세상을 뜨다

권율(權慄)은 조선 중기의 문신, 군인, 정치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字)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 또는 모악(暮嶽),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영의정 권철의 아들이자, 재상인 오성 이항복의 장인이다.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후 성균관전적, 사헌부감찰, 예조좌랑, 호조정랑, 전라도도사, 경성부판관(競城府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1591년(선조 24) 다시 호조정랑이 되었다가 얼마 뒤 의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로 발령되고, 전라도관찰사 겸 방어사 곽영의 휘하에서 한성탈환전에 참전했다. 그해 용인에서 일본군에 크게 패하고 퇴각한 뒤 수원독성산성(禿城山城)에서 주둔, 준비하다. 그의 군대를 밖으로 유인하려는 우키다의 공격을 버텨냈다. 그해 말 일본군의 눈을 피해 고양군으로 주둔지를 옮겨 1593년 2월 13일 행주산성 전투에서 3천8백 병력으로 3만군을 상대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우키다는 군사 2만 6천명이 전사하고 패주시켰다. 


1593년 6월 행주대첩 승전의 공으로 도원수로 승진하여 조선군 최고사령관이 되어, 영남으로 보내졌다. 1596년(선조 29) 한때 도망병을 즉결처분한 사건으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복권하여 이몽학의 난 진압에 참여했다. 


그해 10월 한성부 판윤이 되고, 이후 호조판서,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재차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발생, 올라오는 일본군을 상대하려 명나라 장군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 대진했으나 도어사 양호(楊鎬)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했다. 순천 예교(曳橋)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상대하려 했으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실패하고 퇴각했다. 의정부우참찬을 거쳐 지중추부사에 이르러 1599년 병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7월에 죽었다 임진왜란 중 행주대첩 외에도 금산군 이치(梨峙)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무인으로 알려졌지만 그는 문과(文科)에 급제한 문관 신분이었다. 사후 바로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가 뒤에 영의정으로 가증되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추봉되었다. 1604년 선무공신 1등(宣武功臣一等)에 녹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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