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나다
1931년 일본은 중국 북동부지역인 만주를 점령하고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세웠고 다음해에는 열하성(중국어 간체자: 热河省)을 점령하였다. 이처럼 일본의 침략이 동북지방에 가속화되자 중국 내에서 점차 항일 운동이 확산되었으나 장제스는 먼저 공산당을 분쇄하여 통일을 이루고 난뒤에 일본에 대항하자고 주장하며 대공산군 토벌작전에만 몰두하였다.
그러나 중국내, 특히 동북지방에서 반일운동이 거세게 전개되고 1936년 동북군 사령관 장쉐량이 시안 사건을 일으키자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은 내전의 중단에 합의하고 일본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하려는 두번째 국공합작을 구축했다.
루거우차오는 마르코 폴로 다리라고도 부르는데 이 다리는 전략적으로 베이징과 연결되는 중요한 거점으로 사건발발 당시 일본군은 서쪽을, 국민당군은 동쪽을 관할하고 있었다.
당시 이 부근에 주둔한 군대는 국민혁명군 쑹저위안의 29군이었고 일본군은 카니치로 타시로가 지휘하는 중국주둔군이었다. 양 군은 서로 다리를 놓고 대치하고 있었다.
1937년 7월 7일 야간 훈련 중이던 일본군 중대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일본군 병사 1명이 행방불명이 되는 일이 발생했다. 행방불명되었던 일본군병사는 20분 뒤에 부대로 복귀했으나 일본군은 중국군에게 중국 주둔지역으로 일본군을 보내 수색하겠다고 요청하였고 중국군은 거절하였다. 일본군은 곧 전투태세에 들어가 다음날인 8일 새벽 중국군 진지에 포격을 시작하고 공격하여 루거우차오를 점령했다. 양측이 공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11일 새벽 일단 현지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같은 조건을 내걸고 현지에서 협상이 벌어지는 동안 일본 본국의 제1차 고노에 내각은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침략을 가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이 ‘중국 측의 계획적인 무력 사용’이라고 단정하고 중국에 전면적인 파병을 발표했다.
일본군과 협상은 결렬되고 곧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여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