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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그네 Jul 08. 2024

[역사속의오늘사건] 1994년 7월 8일

한반도 논란의 당사자 김일성 사망하다

1912년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용산면(龍山面) 하리(下里) 칠골의 외가에서 아버지 김형직(金亨稷)과 어머니 강반석의 삼형제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여덟 살이었던 김일성은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 김형직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어린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 뒤 자식의 장래를 생각한 김형직의 결심에 따라 혼자 평양으로 돌아와 외가에서 생활하였다. 

김일성은 열네 살 때(1925년) 아버지의 병세 때문에 다시 만주로 건너가 푸쑹 소학교를 졸업했다. 1926년 3월에 정의부(正義府)에서 길림성 화전현(樺甸鎭)에 세운 화성의숙(華成義塾)에 들어가서 잠간 동안 다니다 6월 부친 김형직이 사망하자 그만두게 되었다. 1929년 5월 조선공산청년회(朝鮮共産靑年會)에 가입하여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이 조직이 일경에 적발되어 그는 유원중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 

김일성은 이후 삼부회중 하나인 정의부가 다른 단체와 통합하여 만들어진 국민부(國民府) 산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좌파에 속한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로 들어간다. 1930년말부터 1931년 초까지 김일성은 회덕현(懷德縣) 오가자(五家子)에서 그의 상관인 이종락 부대의 세금 징수원 노릇을 했다고 한다. 이때 삼성학교 교원이었던 최형우(崔衡宇)가 그에게 일성(一星)이란 별호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것이 그가 김일성이란 별명을 가지게 된 시초이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인과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과 만주의 각지에서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서 개별적 혹은 연합으로 항일유격대를 조직하였는데, 김일성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으로 배속되어 활동했다. 동북인민혁명군이나 그 후신 동북항일연군은 기본적으로 만주 적화를 위한 중공당 만주성위 산하 무장조직이므로 그들이 조선독립운동을 했다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그들은 코민테른 극동지부의 지휘와 감독을 받았다. 1936년 3월 항일독립운동 단체들의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일환으로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통합, 재조직되면서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7년 6월 4일에 그 말 많고 탈 많은 보천보 전투(보천보 습격)가 일어나 일본인 7명 사망, 7명 중상의 피해를 입혔다. 이는 일제강점기 36년 이래 유일하게 독립군의 손으로 잠시나마 영토를 탈환했던 사건으로, 무장독립세력이 거의 사라졌다고 민중들이 생각할 때 일어난 사건으로 그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김일성의 이름이 민중들에게 드러난 사건인데 여기서 김일성 위작설이 등장한다. 보천보 사건을 일으킨 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과 1938년 11월에 항일연군 1로군 제2방면군장(第二方面軍長)이 된 우리가 아는 북한의 그 김일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2군 6사장 김일성은 일제의 항일연군에 대한 집중적인 토벌로 총사령 양정우만 살아 남고, 부사령 이하 모두 전사하거나 투항해버린다. 6사장 김일성 또한 이때 피살되는데 이는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를 통해서 기사회 되었다. 북한의 김일성이 바로 이 6사장 김일성의 보천보 전공을 가로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미확인 상태이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기사가 사실이라는 증거 또한 없으니... 


하여튼 항일연군 1로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전사하고, 투항자들이 속출하여 1로군이 궤멸 위기에 빠지자 김일성은 상관인 위증민(魏拯民, 1909~1941)의 허락도 없이 부하 몇명을 데리고 1940년 10월 23일 소만(蘇滿) 국경을 불법 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한다. 

1942년 7월 스탈린의 지령에 의해 하바로프스크 인근에 항일연군 망명자들을 수용하는 88여단이 창설되면서 그도 거기로 이주하여 대위 계급으로 1대대 대대장(營長)이 되어 8.15 해방 때까지 교육과 훈련을 받는다. 


1945년 8월 초 조선공작단(단장 : 최용건)을 결성하고 조국의 해방과 새로운 국가건설에 대비하였다. 이때 김일성은 조선공작단 정치군사 책임자였다. 해방이 되자 소련의 스탈린은 1945년 9월 초 88여단의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러 직접 면접 시험을 본 후 그 자리에서 북한 지도자로 내정되어 귀국한다. 

소련 군정에 의해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7만여 명의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조선해방축하집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김일성이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과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조만식의 소개로 '김일성 장군'으로 평양 시민들에게 소개되면서 공개적인 정치활동이 시작되었다.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에 대해 어릴 때부터 들어왔던 시민들은 고령의 노 장군을 생각하고 모였지만, 젊디 젊은 청년이 김일성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자, 나이가 맞지 않으므로 군중들 사이에 김일성의 실체를 의심하여 가짜라는 웅성거림이 일어났지만 큰 충돌은 없었고, 이 의구심도 곧 사그라들었다. 실제 김일성의 나이도, 생김새도 몰랐으므로... 소련의 기획력의 성공작이었던 셈이다. 


정치적 기반이 전혀 없던 김일성은 소련의 막강한 지원으로 친일 잔재 청산, 토지 개혁, 주요 산업 발전 지원, 중소 상공업 육성, 노동운동 지원, 민주주의 교육⋅문화 정책 수립 등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 당면 과업」 11개조를 제시하였다. 3월 5일에는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에게'라는 구호를 내걸고 소위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토지 개혁을 전격적으로 단행하였다. 

김일성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내각 수상에 선출되었고, 부수상 박헌영 등으로 내각을 구성하였다. 1949년 대한민국에서 미군이 철수하자 김일성은 고심 끝에 무력통일 계획을 세워 소련의 허락을 구하는데, 스탈린은 이런 김일성의 면회를 거절하는데 김일성은 끈질기게 남침을 허락해달라고 48회나 요구했고 스탈린은 48번씩이나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요구하는 김일성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결국 남침을 허락하고 만다. 


한국전쟁 전후 김일성은 전쟁에 실패한 책임을 부총리인 박헌영에게 전가시키는 등 한국 전쟁의 책임을 정적들에게 돌림으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자신의 확고한 권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더불어 조만식을 평양시 고려호텔에 감금한 뒤 1950년 10월 처형하였고 1952년 연안파인 김무정은 병사했고, 1953년 같은 소련파의 라이벌이던 허가이는 자살했다. 1951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의장인 허헌이 대동강에서 익사했는데, 그의 사망도 김일성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김원봉도 이러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해 처형당하고 만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김일성의 북한에서의 정치적 입지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다지는데 유리하게 이용되었다. 

김일성은 1960년에 이르러 주체사상을 확립하였고,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계기로 새롭게 채택된 사회주의헌법에 따라 그는 국가수반인 공화국 국가주석과 국방위원회 위원장(겸임)에 취임하였다. 이후 김일성 독재체제 하에서 북한은 김일성의 도구로 전락한채 유지되기에 이른다. 

그러던 중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 등 주요언론들은 9일 정오 특별방송을 통해 “심장혈관과 동 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오던 중 겹쌓이는 정신적 과로로 94년 7월 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 했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었으며 모든 치료를 다했으나 심장쇼크가 악화돼 7월 8일 새벽 2시에 사망했다”고 보도되며 그의 사망이 특보, 호외로 전국에 동시에 발표되었다. 

김일성, 김정은이 묻혀있는 금수산 태양궁전

보천보 전투의 진위논란, 당사자 실제인물 논란, 한국전쟁의 당사자 등 한반도 논란을 불러일으킨 김일성 그가 1994년 7월 8일 한반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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