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 열사, 헤이그 이국땅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다
이준(李儁)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순칠(舜七), 아호는 일성(一醒), 해사(海士)이다. 조선 추존 군주 환조의 아들인 완풍대군(完豊大君)의 18대손이며 함경남도 북청 출생이다. 어려서 한학을 익혔고 성장해서는 고향 부근에서 경학원을 설립, 교육 사업에 종사하다가, 상경하여 박영효 등 개화파 인물들과 교유하였다.
36세에 법관양성소를 1회 졸업생으로 나오고 나서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었다. 검사 5년차에 법무대신 이하영을 탄핵하였다.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아서 박해받기도 할 정도로 강직한 근무를 했다고 한다.
1895년 서재필의 독립협회에 가담해 활동하였으며, 을미사변으로 일본에 망명했다가 돌아왔다. 일본에서는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했고, 돌아와서는 다시 독립협회에서 활동했으며, 상동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당시 상동교회는 전도사 전덕기를 중심으로 개화파 청년들이 많이 모여든 장소였다.
1902년에는 민영환의 비밀 결사 개혁당에 가담했으며, 1904년 공진회 회장을 지냈다. 공진회 활동으로 유배 생활을 한 뒤, 1905년 국민교육회 회장에 취임하고 보광학교, 오성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계몽 운동에 힘썼다.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상동교회의 전덕기, 이동휘, 이회영 등은 고종의 밀사를 파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고종에게도 신임장을 받아 특사로는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이준이 정해졌다.
이준은 고종의 신임장을 들고 만주의 이상설, 러시아의 이위종과 차례로 합류하여 헤이그로 향했다. 그러나 을사조약 체결이 일본에 강제에 의한 것이었음을 폭로하려 했던 계획은 영일 동맹으로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의 방해로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준 열사는 헤이그의 숙소에서 병환으로 사망하였으나 오랫동안 할복 자살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이는 대한매일신보를 경영하던 양기탁과 배델이 민족적 긍지를 드높이기 위해 당시 주필이었던 단재 신채호 선생과 협의하여 할복자살한 것으로 기사를 왜곡 보도해기 때문이었다
당시 네덜란드 신문에도 이준 열사가 병환으로 호텔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이준 열사의 독립에 대한 의지와 기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