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동서로 분열이 되다
동서 교회의 분열은 기독교 역사상 11세기에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가 상호 파문으로 분리된 사실을 말한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유럽의 변화와 관련된 5가지 사건을 알아야 한다. 많기도 하네.
5가지 사건이란 수도원 운동, 프랑크 왕국의 성립, 이슬람의 팽창, 동서 교회의 대분열, 마지막으로 신성로마제국의 수립이다.
수도원의 역할은 초기 중세 유럽 문명에서 고전 문화의 보존 및 전달, 들의 개종이었다. 이러한 수도원 운동은 동지중해와 이집트의 사막에서 출발한 엄격한 수도원 운동은 갈리아로 전파되었다. 갈리아에 전파되었던 수도원은 다시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그리고, 이렇게 대륙에서 섬나라로 들어갔던 기독교가 이제는 다시 섬나라에서 대륙으로 퍼지게 되었다.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출신의 수도사들은 농촌 지역의 미개하고 원시적인 농민 대중을 대량 개종시켜 유럽을 기독교 대륙으로 만들었다.
대륙의 기독교 수도원들은 대부분 보니파키우스의 영향을 받아 아일랜드 베네딕토계의 계율을 받아들였다. 특히 보니파키우스는 첫째는 그의 전도 사업으로 대부분의 게르만족이 최초로 기독교 세계에 편입되었으며, 둘째로 갈리아 지방에서 그의 활약으로 프랑크 국왕과 로마 교황 간의 관계가 전례없이 밀접해지게 되었다.
로마는 분열되었으나 제국의 중심은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었다. 서로마 제국은 타종교와 야만인들이 설치는 폐허나 다름없는 상태였으므로, 동로마 제국이 중심을 이루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 또한 동방 지역에서 황제권을 수호할 뿐, 서방 속주의 탈환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등장하면서 해소되는데 문제는 그가 라틴 문화를 중시하여서 이후 동로마 제국은 급속히 그리스화 하였다.
동로마 제국에 있어서 게르만계열의 야만족들에게 유린당한 서유럽은 그들에겐 더 이상 관심사가 아니었다. 다만, 그럼에도불구하고 이탈리아에 대해서 간섭만 하고 있던 상황이 지속되었다. 이 와중에 동로마는 이슬람 세력과 마주하게 되었, 그들과의 끊임업는 전쟁으로 심각한 재정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서로마 교회는 수많은 야만족들을 개종하였으며, 그 중에 한 부족인 프랑크족은 통치상의 필요로 로마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라틴화 된 갈리아를 지배하는 데에 라틴 문명인 서로마 교회의 협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프랑크족은 롬바르드족의 침략으로부터 서로마 교회를 지켜주었다. 로마 교황이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고 프랑크 왕국과 제휴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이다.
반면 이슬람의 침략을 물리친 동로마 황제 레온 3세는 심각한 문제에 처했다. 하나는 성상 공경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토지 소유에 의한 조세 수입의 격감이었다. 성상 공경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황제 레온 3세는 이런 폐단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더불어 레온 3세는 성상파괴령을 이용하여 토지 개혁을 달성하고자 했다. 토지 개혁이 이뤄지면, 소규모 자영농이 증대하고, 조세 수입도 증대될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와 목적으로 726년에 첫 성상파괴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서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레온 3세의 성상파괴령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에게 도전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이제 막 개종한 북방 야만족들의 힘을 빌려 무력을 행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것이다.
이러한 도전에 격분한 레온 3세는 그레고리오 2세의 체포를 명령했으나, 그들은 서로마의 롬바르드군에 의해 격퇴되었고, 격분한 레온 3세는 교황의 권리를 모두 몰수하여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게 넘겨주었다.
이후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는 서로마 교회를 보호하면서 동로마와 척을 지게 되고 이에 서로마 역시 동로마 교황을 파문하면서 이로써 교회가 동서로 분열되기에 이른다.
상호 파문을 하여 교회가 동서로 분열된 그날이 바로 1054년 7월 16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