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4세의 사망 이후 즉위한 루이 15세의 시대는, 절대왕정의 화려한 바로크 문화가 점차 빛을 잃고 로코코 문화의 씨앗이 움트던 과도기였다. 이 시기는 곧 바로크의 종결과 로코코의 시작점으로, 음악 또한 그 변화를 반영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 작곡가는 장 필리프 라모(Jean-Philippe Rameau, 1683–1764)였다. 그는 1733년 오페라 《아폴리트와 아리시(Hippolyte et Aricie, RCT 43)》의 초연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이후 《멋쟁이 인도인들(Les Indes galantes, RCT 44)》을 비롯한 다수의 오페라를 발표하여 뤼리(Lully) 이후 프랑스 극음악의 중심 인물로 자리했다.
라모는 뤼리의 형식을 계승하면서도, 더 화려한 화성과 극적인 표현을 통해 새로운 음향세계를 개척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청중들, 특히 뤼리의 전통을 중시하던 이들은 그의 작품을 “불협화음이 지나치고 시끄럽다”고 비판했다.
흥미롭게도, 《아폴리트와 아리시》를 두고 한 평론가가 처음으로 이 음악을 “바로크적(baroque)”이라 표현했는데, 이것이 ‘바로크’라는 용어가 예술양식을 지칭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된다.
1700년경 프랑스에서는 칸타타(cantate) 장르가 성립하기 시작했다. 그 선구적 작품은 마르크 앙투안 샤르팡티에(Marc-Antoine Charpentier)의 《지옥으로 내려간 오르페오(Orphée descendant aux enfers, H.471)》이다. 뒤이어 라모, 니콜라 베르니에(Nicolas Bernier), 앙드레 캉프라(André Campra), 미셸 몽테클레르(Michel Montéclair), 루이 니콜라 클레랑보(Louis-Nicolas Clérambault) 등이 칸타타 장르를 확장했다.
이들의 작품은 대위법과 성악 작법 면에서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나, 선율과 기악 반주는 여전히 프랑스 서정비극(tragédie lyrique)의 유려한 특성을 간직했다. 즉, 프랑스 칸타타는 이탈리아적 정열과 프랑스적 절제의 절묘한 혼합체였다.
프랑수아 쿠프랭(François Couperin, 1668–1733)은 프랑스 클라브생 음악을 정점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그는 1716년 《클라브생 연주법(L’art de toucher le clavecin)》을 출판하여 자신의 연주 기법을 유럽 전역에 알렸으며, 현대적 운지법과 꾸밈음 연주의 정석을 제시했다.
쿠프랭의 음악은 이전 세대보다 훨씬 유연한 선율, 정교한 장식, 섬세한 화성 표현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기존의 ‘모음곡(suite)’ 대신 ‘오르드르(Ordre)’라 부르는 보다 자유롭고 다채로운 형식을 사용했다. 또한 그는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이탈리아식 트리오 소나타(trio sonata)를 시도한 작곡가였다. 이탈리아 음악의 명료함과 프랑스 음악의 우아함을 결합하려는 그의 시도는 양식적 융합의 대표적 예로 꼽힌다.
쿠프랭 이후, 프랑스에서도 점차 소나타와 협주곡 장르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장 페리 르벨(Jean-Féry Rebel, 1666–1747)은 1713년 《2성과 3성 소나타(Sonates à II et III parties)》를 출판하며 프랑스 내에서 보기 드문 바이올린 독주 소나타를 남겼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적 세련미와 이탈리아적 기교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한편, 조셉 보댕 드 브와모르티에(Joseph Bodin de Boismortier)와 미셸 코레트(Michel Corrette) 등은
18세기 초반 베네치아 협주곡 양식을 도입해 프랑스식으로 변용한 협주곡을 발표했다.
이 시기에는 특히 플루트 트라베르시(flûte traversière), 즉 “가로플루트”가 귀족 사회에서 유행하면서 플루트를 위한 다수의 협주곡과 소나타가 작곡되었다. 반면, 르네상스 이래의 악기였던 비올(viol)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루이 15세 시대의 프랑스 음악은 뤼리로 대표되던 궁정 바로크의 장중함에서 벗어나 라모와 쿠프랭을 통해 세련되고 감각적인 로코코 미학으로 이행한 시기였다. 이탈리아의 영향이 점차 스며들었지만, 프랑스 특유의 우아함과 절제는 여전히 그 중심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