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4

'나'는 도망치는 걸 선택했다.

by 알럽윤

4. '나'는 도망치는 걸 선택했다.


모니터에 내 이력서를 한참을 바라봤다. 정말 내가 봐도 물경력의 끝판왕인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력서를 수정한 건 저장하고 컴퓨터를 꺼버렸다.


밖에서 들리는 여러 가지 소음에 집중하게 된다.


사람들의 재잘재잘되는 소리.

회사 이야기하면서 뒷담 화하는 사람들.

가끔 들리는 대학생들의 전공이야기.


마냥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게 좋았다.

왠지 나도 모르게 그 대화를 듣고 있으면 나도 그 사람들 틈에 있다는 착각이 드는 거 같았다.


날씨를 보니 가을 날씨가 너무나도 좋았다.

심지어 내가 살고 있는 제주도는 가을 날씨가 미쳤다.

한참을 베란다에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높았고 푸른 하늘은 색감이 정말 미쳤다.

햇빛이 창문을 통해 거실 한가운데까지 비쳤다.


'청소나 하자.'


오랜만에 청소를 시작했다.

정말 불필요한 물건들을 다 버리기 시작했다.

1년 동안 내가 찾지 않았던 모든 물건들을 다 버리고 정리하고...

무의미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만 머릿속을 비우거나 정리할 때에는 정말 최고의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조그마한 자취방을 청소하는데 4시간이 걸렸다.

쓰레기봉투 50L가 꽉 찰 정도로 많이 나왔다.


쓰레기를 버리려고 집을 나왔다.

그리고 대표님께 연락이 왔다.


'다음에 연락하자.'


"미친 X."


월급도 밀린 사람이 참... 뻔뻔하게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어이가 없었다.

쓰레기 버리면서 그 사람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다 버렸다.


'일부 급여라도 정리해 주시길 바랍니다. 지금 실업급여 신청해도 그 돈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합니다.'


카톡을 보냈다.

역시나 읽고 씹으셨다.


쓰레기를 버리고 집 근처 공원에서 앉아 멍하니 주변 사람들을 구경했다.

4시 정도인데 몇몇 사람들은 강아지 산책하러 나오고 학교가 끝난 건지 중고등학생들도 보였다.

하나같이 나 빼고 다 웃고 있었다.


'지금 나만 걱정이 한가득이네...'


한숨이 크게 나왔다.

폐 깊은 곳에서 나오는 찐 한숨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폐 깊숙이 들어오면 내 걱정도 다 가지고 나갈까 봐 깊숙이 숨을 들이마셨다.

한참을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고 무의미한 행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상무님께서 전화가 오셨다.


"네. 상무님."


[어! 윤주임. 어때? 백수 첫째 날?]


"거지 같아요. 오늘 월급 이야기 대표님께 했는데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하네요."


[그 사기꾼 새끼 말 믿지 마.]


상무님의 격한 마음이 전화를 통해서 느껴졌다.


"에효. 걱정이네요. 밀린 급여가 한두 푼도 아닌데."


[그렇지. 그냥 나처럼 고소해 버려. 그냥 몇 년 뒤에 받을 돈이라고 생각하고.]


상무님은 퇴사 직후 바로 변호사를 선임했다고 한다. 사기꾼 같은 대표님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면서.

그런 강단 있는 상무님이 내심 부럽기도 했다.


"고소하고 신고하고... 이게 너무 무서워요. 솔직하게."


내 나이에 많은 산전수전을 겪어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내 인생에서 누군가를 고소할 일은 없었으면 했다. 왜냐하면 '고소'라는 말이 무섭게만 느껴졌다. 나와는 동떨어진 세계의 단어라고도 생각했다.


[뭐가 무서워. 내가 도와줄게.]


"말씀만이라도 너무 감사합니다."


정말 큰 도움이 되는 말이었다.

누군가 나를 도와준다는 말...

오늘 들었던 말 중에 가장 큰 위로가 되었다.


[바로 취직할 거야?]


"잘 모르겠어요. 상무님은 바로 취직하시나요?"


[나는 처자식이 있잖아. 해야지.]


상무님도 현실에서는 많은 걱정을 하는 거 같다.

당연히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기에 나보다 더 어깨가 무거울 것이다.


[윤주임. 생각이 복잡하면 이번연도는 쉬어. 실업급여 신청하면서 자격증도 좀 따고.]


"쉬어도 될 자격이 있는지... 참... 그렇습니다."


[쉬는데 무슨 자격이 필요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좀 쉬면서 자격증을 따.]


"... 알겠습니다."


[그래. 윤주임 걱정되어서 전화했어. 나중에 또 전화할게.]


"감사합니다. 상무님."


[그래. 푹 쉬어!]


상무님과 전화통화를 끊고 하늘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아까 전화통화 내용을 곱씹었다.


나는 지금 이 우울한 거 같으면서 안 좋은 기분이 왜 들까?

갑자기 잘려서 이런 기분이 든 건가?

아님 취직을 준비하는 게 귀찮아서?

아님 돈도 못 받고 잘려서?

대표님에 대한 원망?

.

.

.

.

많은 추측을 했지만 내 기분이 왜 이렇게 안 좋은지 정의가 안된다.

이런 개 같은 상황을 준 대표에게 화나는 건 정답이긴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 다시 컴퓨터를 켜고 이력서를 다시 확인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물경력...

그냥 좀 쉬다가 일 구할까?

한 3개월 정도?

내년에 일을 구하는 것도 방법이긴 한데... 나이가 너무 많나?


자존감이 박살이 난 느낌이다.

원래 자존감이 별로 없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박살이 나다 못해 유리조각처럼 산산조각 난 거 같다.


나이를 생각하면 20대 때 뭐 했나 싶고

내 경력을 보면 왜 노력을 안 했지? 나에 대한 혐오가 생겼다.


또다시 모니터만 바라봤다.

그러다가 이렇게 있으면 내가 정말 불쌍하다 못해 나 스스로가 혐오하는 인간이 될 거 같았다.


"정신 차려."


나 스스로가 나에게 하는 말이다.


"내일부터 일단 밖으로 나가자. 취직이고 나발이고. 공부를 하든 뭔가를 하든. 정신 차리자."


.


"이런 썩은 정신으로는 아무것도 도전도 못하겠다. 일단 쉬고 정신 차리자!"


내 썩은 정신을 개조하기로 했다.

이러다가 월급도 받기 전에 썩은 정신 때문에 온몸이 아플 거 같았다.


"일단 쉬자. 내 이력서 보면 정신에 안 좋아."


순간적인 회피다. 온갖 핑계를 대면서.

혹시 일본의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라는 드라마를 아는가?

드라마를 본 적은 없지만 이 제목은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적당한 이유가 되었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이 말처럼 나는 지금 이 순간은 도망가지만 나는 싸울 준비하는 거라고 생각하려고 한다.

다음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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