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풀이 생기더라

갖고 있을래? 갖다 버릴래?

by 갸름이 조문희

살다 보면 옷이나 인간관계나 보풀이 생기는 건 마찬가지인가 보다. 쓸리고 긁히고 부딪치면서 생기는 보풀.

보풀이 생긴 옷은 겉으로 보기에도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데 하물며 인간관계 가운데서 생긴 보풀은 어떨까.


엄마와 분리되어 따로 살았다면 잊고 살았을 테지만 어쩌다 함께 살게 되면서 하나 둘 생긴 보풀이 이제는 보풀 무덤이 되었다.

괜찮은 줄, 나이도 있고 글을 쓰면서 엄마를 더 이해하고 더 끌어안으리라 했었고 그래서 엄마에 대한 복잡하고 힘들었던 감정들이 사라진 줄 알았는데...




연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네가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잘 먹여 주니 내가 이렇게 산다. 너 때문에 산다."를 말씀하시는 엄마.

나와 함께 있어 행복하다면 다행이고 감사한 일인데,

어째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엄마를 두고 복잡한 심경은 지하실 저장 창고로 걸어 들어가는지.


기억이 결국 이 지점까지 와버렸다. 언젠가 폭풍 오열을 했던.

"내가 시험(대학 입시) 전날 김밥을 한 줄 사서 방 유리창 뒤에 뒀다가 점심시간에 먹었잖아. 내가 그 김밥을 먹는데 얼마나 슬펐는 줄 알아. 흑흑..."

언니들과 이야기 중에 나온 폭풍 오열이고 여태껏 엄마는 모르시는 일.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오은영 박사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자식도 부모에게 좋은 기억이 있어야 봉양을 하든 효도를 하든 한다고.

세상살이가 상대적이라는, 심지어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주고받고 가 일반적 규칙이라는 뜻인데 까놓고 얘기하면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피도 눈물도 없는 삭막한 세상에 초점을 맞추는 어리석음보다 어느 경우에도 서로에게 잘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발전적이지 않을까. 적어도 자신의 감정을 함부로 휘둘러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함부로이 휘두른 돌멩이에 개구리는 죽을 수도 있으니.


사실, 어린 시절에 대한 좋았던 기억이, 추억이라는 게 없다.

내게 있는 어린 시절 기억이라는 것은 생일날 허락 없이 친구를 초대해 호되게 혼났던 기억.(동네 친구 3명이 눈치를 볼 정도로, 어린 딸을 그렇게까지 감정적으로 혼냈어야 했을까)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는다고 밤새도록 난리, 난리를 치던 엄마에 대한 기억.(충혈된 눈으로 울면서 학교를 갔었지)

그리고 바로 그 너무 서러운 기억이라 어디서도 꺼내놓지 못했던, 말없이 입시를 준비하다 전날 김밥 한 줄을 사서 방 유리창 뒤에 놓았다가 가져가 점심으로 먹었던 기억.(무언가를 말하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부모로부터 사랑과 보호를 받았다거나 성숙한 어른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거나 이런 당연하고도 따뜻한 기억은 어디에도 없는 어린 시절. 결코 추억이라 말할 수 없는 그런 것들뿐이다.


엄마도 계모 밑에서 비교와 결핍만을 보고 자라 쓴 뿌리가 있어, 또 배우지 못해 잘 몰라 그랬겠지만, 모든 가족들의 1부터 10까지를 통제하려 했던, 그러면서도 자신의 감정은 전혀 통제하지 못했던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엄마는 주변의 모든 것이 자신의 뜻과 생각대로 움직여야만 했고 그렇지 않을 경우엔 밤새도록 난리에 난리, 우리 집은 생지옥이었거든.





할 수 있는 만큼은 최선을 다하려 하지만 보풀이 눈에 거슬릴 때마다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늙은 엄마를 두고 이런 생각을 갖는 죄스러움.

치매 5등급을 받으신 엄마에게 따져 물을 수도 없고 지금의 엄마가 무언가를 되돌릴 수 없는 것도 잘 알고 있는데...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에게 준 상처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니 그 상처는 고스란히 자식의 것. 그때의 상처와 아픔을 그대로 갖고 가야 할까?


갖고 있을래? 갖다 버릴래?


폴 투르니에는 「고통보다 깊은」에서 우리는 고통과 싸워야 하며 그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 가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넌 어떻게 할래? 묻는다. "지금 긍정적, 적극적, 창조적으로 반응해서 너를 성장시킬래? 아니면 부정적, 소극적으로 반응해서 실패한 인생을 살래?"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가에 따라 우리 인생은 성공과 실패를 나뉠 수 있다는 것이다.

글쓰기에는 기적이 산다 161쪽 중에서


그래서 쓴다.

갖다 버리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