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룩백>을 보고
친구가 있습니다. 이 친구가 얼마나 영화에 진심이냐면, CGV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데다가, 좋아하는 영화가 생기면 최고의 관람을 위해서 집에서 2시간 거리인 용산 아이맥스까지 갈 정도죠.
그런 친구였기에 요즘 볼 영화가 없다는 이야기를 쉽게 꺼낼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매달 볼 만한 영화가 나오던 때도 있었는데 2주 뒤 베테랑 2 말고는 딱히 기대되는 게 없다고.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친구가 <룩백>이라는 영화를 추천했습니다. 룩백? 처음 들어보는 제목에 괜히 귀를 쫑긋거리며 어떤 영화인지 물어보았죠.
"음, 일단 원작이 진짜 명작인 단편 만화거든. <체인소맨> 작가가 만든 거라서 그림도 좋고."
"응응."
"영화 내용은 청춘물 느낌? 생각할 거리도 있고."
"응응."
"그리고 러닝 타임도 58분밖에 안 돼."
"응... 응?"
58분...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짧은 애니메이션 영화. <최애의 아이>는 12화 중 1화가 90분이라던데 58분은 너무나 빈약한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더 정확히는, 그렇게 짧은 영화를 본 적이... 있던가요?
영화비는 12000으로 동일했고 오직 Megabox에서만 상영. 그렇지만 요즘 진짜 무료했던 차라 한번 속아보자 싶은 마음으로 다른 친구의 도움을 받아 할인티켓을 구해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스토리는 58분 만에 진행되는 영화인만큼 간단했습니다. 함께 만화를 그리던 두 소녀 후지노와 쿄모토가 배경 예술에 꿈을 품은 쿄모토에 의해 갈라지게 됩니다(배경 예술이 뭔가 싶지만 아마 애니메이션의 배경을 그리는 background artist/stylist일 것 같습니다).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고 '샤크 킥'이라는 만화로 정식 만화가가 된 후지노는 연재 중 tv로 쿄모토가 진학한 미대에서 흉기 난동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됩니다. 후지노는 방구석 외톨이이던 쿄모토를 세상으로 끄집어낸 것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연재를 중단합니다. 하지만 쿄모토의 방에서 책장 가득한 후지노의 만화책과 자기가 사인해준 옷이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보고 다시 연재를 재개합니다. 그리고 끝.
하지만 영화로 보면 세밀한 디테일이 인상적인 영화였습니다. 먼저 애니메이션 적으로 인물들의 움직임이 - 둘 밖에 없지만 - 둥근 곡선으로 정말 부드럽게 이어진 것이 대단했습니다. 마치 지브리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이 정말 움직이는 사람을 찍어서 그림으로 그대로 옮긴 것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감독이자 원화가인 오시야마 키요타카가 실제로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작업한 경우가 있어서 '그럴만하다' 싶었습니다.
음악은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중심으로 전형적인 사람을 울리기 위한 음악 같았습니다. 나쁘다는 뜻은 아니고, 좋습니다. 특히 초반부 1년 반 동안 그림만 그려온 후지노의 책상에 앉은 뒷모습을 연속적으로 보여주는 연출에서 나오는 음악은 정말 잘 어울렸습니다. 하지만 가장 음악적으로 좋은 부분은 후반부의 음악을 '안 쓴' 장면이었습니다. 쿄모토의 죽음 이후 그녀의 방 앞에서 후지노가 들어가길 주저하는 장면. 그 장면에서 아무 배경 음악도 대사도 없이 정말 무음으로 후지노의 표정을 보여주니 더욱 공허하게 느껴졌다. 오죽하면 영화관에서 트는 에어컨 소리가 시끄럽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가장 좋았던 것은 이 짧은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나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재미가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먼저 작품 내적으로, 엔딩 크레딧 전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다음과 같이 끝납니다(아마도).
- 있지, 난 사실 만화 그리는 거 안 좋아해. 시간만 많이 걸리고, 굉장히 힘들고.
- 그런데 왜 만화를 그리냐고? 음, 그건...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 대답을 유추해야 합니다. 하지만 언어로 표현하지 않아도 이미 영화 전체의 스토리를 보면 정답은 쉽게 유추됩니다. 후지노가 만화를 그리는 이유는 - 쿄모토보다 만화를 못 그린다는 것에 좌절한 후지노가 다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이유는 - 연재 중단한 만화를 다시 그리기 시작한 이유는, 모두 쿄모토라는 한 사람의 팬을 위해서였으니까.
하지만 정답이 뻔해도 이런 식의 연출은 그 정답을 직접 관객에게 생각해보게 함으로써 그 정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게 만듭니다. 마치 초등학교 때 "2+4가 뭐니?"라는 질문에 손을 들어 대답할 때 가지는 고양감... 비슷한 것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영화가 끝나도 남아있는 질문.
"내 팬은 누구일까?"
나의 팬.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나의 무엇을 응원할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아마 이 대답은 앞으로의 인생을 살면서 채워나가야겠지요. 다시 한번 내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얻은 것 같아서 괜히 기분 좋아지는 영화였습니다.
작품 외적으로는... 듣기로는 일본 애니메이션 회사 쿄애니의 방화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점이 있다고 하던데, 찾아보니 <룩백>의 범인과 실제 피의자의 범행 동기가 똑같더군요. "내 작품을 표절한 너희들"이라는 주장. 일본어로 직접 뉴스를 볼 수는 없었지만, 실제 현실은 더욱 참혹했던 것 같습니다 - <룩백>에서는 3명 사망 12명 부상이었지만 실제 방화사건에서는 36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결국 영화를 본 시간보다 그 뒤의 여운이 오래 남는, 좋은 영화였습니다. 물론 원작인 만화책이 티켓값의 반값이라고 하면 억울할 수 있지만, 그만큼 애니메이션으로도 스토리적으로도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평점 ★★★★★
짧아도 애니메이션이 아닌 영화로도 완성도가 높았고, 그 이상으로 재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