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요, **극장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해요?” 평소 자주 접하지 않는 경상도 억양이 짙은 말이 들려왔다. 나에게 한 말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느라 천천히 고개를 들어보니 비슷한 또래처럼 보이는 여자가 보였다.
“아, **극장요. 여기서 쭉 가다가 두 번째 골목에서…” 하며 길을 알려주다 “ 내가 데려다줄게 따라와요” 하며 앞장서 걸으려 하자 그 여자가 급하게 막아선다.
“ 사실 **극장을 가려는 게 아니라 그 근처에 커피숍이 많다고 해서 커피숍을 가려고 해요. 누구를 기다려야 하는데 시간 보낼 데가 없어서요”
그렇게 길 위에서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날은 학기말 시험이 끝나는 날이었다. 평소에 학점관리를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험이라는 중압감에 며칠간 밤잠 줄여가며 시험준비를 했었다. 그래서였을까 마지막 시험이 끝나자 허탈감이 밀려왔다. 온몸에 진이 빠져나간 허깨비처럼 캠퍼스를 빠져나오다 가끔 오다가다 들리는 학교 앞 만화방으로 갔다. 아직 이른 시간에 집으로 가기도 싫고 그렇다고 친구들과 어울려 시험 끝난 뒤풀이를 하러 가기도 싫었다. 혼자 있고 싶었고 시험공부하느라 애쓴 나에게 보상이 필요했었다.
만화방은 아무도 없었다. 손때 묻은 책에서 나는 특유의 퀴퀴한 냄새만이 만화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앉으면 푹 꺼져버리는 낡은 소파의 쿠션감이 위로를 해주는 것 같아 남은 오후를 만화책 보는데 다 써버렸다. 그때 본 만화는 허영만 작가의 ‘고독한 기타 맨’이었다.
주인공 강토는 천재적인 음악성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에게 상처를 받아 기타 하나 둘러메고 떠돌아다니며 자신의 음악세계를 찾아 나간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오래돼서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잘 안 난다. 하지만 고독한 방랑자의 모습으로 기타 하나 둘러메고 떠 도는 강토의 인생 스토리는 내 여행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떠나고 싶었다. 둘러 멜 기타는 없지만 가방하나 둘러메고 길을 떠나기로 했다. 그날도 역시 목적지는 없었다.
목적지가 없는 길 떠남은 바쁠 것도 없고 서두를 것도 없어서 좋다. 어디를 가도 괜찮고 그곳이 어디든 나를 위한 여행지가 되어 준다.
내가 슬퍼 보이는 그녀를 굳이 **극장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한 것도 급할 것도 서두를 것도 없이 떠나는 여행의 시작길에서 그녀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녀가 원하는 곳, 누군가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기에 어울릴만한 곳으로 그녀를 안내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시간이 많은데 같이 기다려줄 수 있다고까지 말해버렸다. 그녀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도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름: 안**
나이: 나와 같은 대학 3학년 생
사는 곳: 대구직할시( 그때는 광역시가 아니라 직할시라고 했다. 그만큼 참 오래전 이야기다)
이 곳에 온 이유: 군에 간 남자친구를 만나러 왔다 ( 정확히는 방위를 받는 남자친구다)
“ 갑자기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어.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군 입대를 했거든. 아무리 참으려 해도 견딜 수 없을 만큼 보고 싶은 거야 그래서 무작정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 친구 집이 있는 여기까지 온 거야”
“그럼 남자친구랑 연락이 된 거야?”
“아니… 집으로 전화했더니 아직 집에 안 왔대”
“그럼 네가 이 곳에 온 거 남자친구가 모르고 있는 거야?”
“응, 친구 엄마가 전화받으셔서 누구냐고 물어보는데 대충 얼버무리다 얼른 끊었어. 나 사귀는 거 부모님한테 얘기 안 했다고 들었거든”
“ 흠, 그럼 네 계획이 뭐야? 그냥 이렇게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남자친구는 방위를 받으니까 퇴근하고 집에 오면 연락이 되지 않을까? 일단 기다려 보려고. 그래서 어디선가 기다릴 장소가 필요했던 거야. 네가 같이 와주고 기다려줘서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몰라 정말 고마워”
요즘이야 군인들도 지정된 시간에는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어서 연락의 어려움을 겪지 않지만 그땐 세상에 휴대전화가 발명될 거란 사실도 까마득히 몰랐던 시절이었다. 달랑 이 도시가 집이라는 것과(무슨 동인지도 모르단다) 집 전화번호, 이 두 가지 정보만이 남자친구를 재회할 수 있게 해 줄 유일한 단서였다.
연락할 수 있는 방법도 없이 무작정 찾아온 그녀의 대책 없는 당돌함에 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찾아왔는데도 만나지 못할까 봐 초초하게 마음 조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안타깝기도 하고 어떻게든 남자친구와 연락이 닿을 방법을 함께 찾아 주고 싶었다.
우린 커피숍에서 몇 번 더 전화를 해보았으나 끝내 남자친구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마지막 전화는 커피숍 남 아르바이트생에게 사정 얘기를 하고 대신 전화를 부탁했는데 하필이면 그날 비상이 걸려서 오늘은 퇴근을 못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 얘기를 듣자 그녀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래도, 밤이 늦더라도 어떻게든 얼굴 잠깐이라도 볼 수 있겠지 하던 기대, 정 힘들면 전화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겠지 하던 실낱같던 희망이 다 사라져 버렸다.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그녀를 어떻게 위로해줘야 할지 난감했다.
한동안 그녀의 눈물을 그냥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의 사무치는 그리움과 가슴이 먹먹해지는 사랑이란 감정이 왠지 부럽기도 했다.
나도 누군가를 저렇게 갈망한 적이 있던가? 그리움에 휩싸여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적이 있던가?
“**아, 우리 술 마시러 가자.” 우리처럼 가난한 학생들이 잔뜩 모여있는 술집은 궁색한 주머니에도 전혀 빛을 잃지 않는 젊음의 열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도 차츰 진정이 되는지 그 분위기에 조금씩 동화되기 시작했다.
“**아, 난 솔직히 지금 너의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 너의 사랑, 그리움들 그것을 온몸으로 표현해 내는 너의 솔직한 감정들이 정말 예뻐 보이고 부럽다고”
나의 위로 같지 않은 위로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천천히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그녀도 자신의 애절한 그리움이 가슴을 조이는 것만이 아니라 한편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열정일 수도 있구나라는 것을 알아챈 듯했다. 그녀는 조금 더 밝아진 얼굴이 되어 잠시 남자친구의 부재를 잊고 스무 살 청춘이 누리는 즐거운 혼돈 속으로 함께 빠져들어갔다.
기타 하나 둘러메고 세상을 떠 도는 강토의 인생을 흠모하다가 길 위로 나섰다. 전혀 계획에 없던 떠남이었다. 그녀는 군에 간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어 그의 흔적이라도 느낄 수 있을까 싶어 무작정 낯선 도시로 왔다. 그녀 역시 전혀 계획에 없던 길 떠남이었다.
떠남의 이유는 같지 않았지만 우리는 우연히라는 단어 속에서 만남이라는 인연을 가지게 되었다. 무수히 지나는 타인처럼 그렇게 흘러갈 수 있는 사이였지만 아마도 길 떠남이란 화두가 우리에게 인연이라는 결정체를 만들어 내지 않았을까? 그 인연으로 나와 그녀는 가장 반짝거리는 이십 대의 많은 순간들을 공유하고 소통하면서 서로를 응원하는 사이가 되었다. 여행이 만들어 낸 작은 기적인 것이다.
“ 너 우리 집 갈래? 어차피 어디든 떠날 계획이라며. 그럼 첫 도착지를 대구로 하는 건 어때? 나랑 같이 대구로 가자”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은 참 그녀 다운 제안이었다. 나만큼이나 즉흥적인 감정선의 흐름을 가진 그녀를 보니 동지를 만난 듯 든든하기도, 재미있기도 했다.
여행의 진짜 목적지는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갔다.
결국 나와 그녀는 도시에서 출발하는 마지막 밤 기차를 타고 대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