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부모교육에서 부모 역할에 대한 강의 중에 한 참여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자녀들에게 저렇게 하세요?” 그 찰나에 난 얼어붙었고, 당황했으며, 답을 열심히 찾아 헤맸다. 찰나의 혼란이 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침착한 척하고 미소를 지으면 답했던 것 같다. “이렇게 하려고 애를 쓰는 거죠. 저도 실수하고 후회하죠.”라며 웃으며 답했던 것 같다.
상담사도 별수 없다.
상담사는 자녀와의 관계, 부부관계 등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현명하게 잘할 거라 생각하는 거 같다. 그러나 상담사는 직업일 뿐 그저 한 사람일 뿐이다. 오히려 문제가 생기면 머릿속만 더 복잡해진다. 아는 게 더 무섭다고 오히려 후회와 자책이 더 강하게 후폭풍처럼 몰려올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예전에 젊은 여자 교수님의 고백이 생각난다. 4살 된 아이가 있는 교수님은 교수이기 전에 아이 엄마로서 아침 시간은 워킹맘들이 흔히 겪는 전쟁통이란다. 아침에 아이의 등원 준비로 실랑이를 하면서 교수님은 자신의 밑바닥을 보게 된다면서 한숨을 쉬셨다. 그 교수님이 강의했던 과목이 마음 챙김과 관련된 과목이었는데, 4살 아이와 아침 시간에 실랑이하는 전쟁통에서는 마음 챙김도 아무 소용이 없다. 나도 두 아이를 키우며 심리학 공부를 했지만, 아이와의 갈등 상황에서는 심리학적 이론이 떠오르진 않았다. 심리학 이론은 후회할 때만 잘도 떠올라 촘촘히 자책하게 만들 뿐이었다.
자녀 문제만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부딪치고 실수하는 일이 태반이다. 내담자들에게는 상대를 변화시키는 건 불가능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변화는 자신 뿐이라고 말하면서 정작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내 아픔의 원인은 오롯이 상대에게 돌리는 편협한 마음으로 상대를 미워하고, 잘못을 들추어내면서 내 치부를 감추는 교묘한 술책을 참 잘도 사용했다. 그리고 술책을 사용한 내 미숙함을 깨닫고 부끄러움과 수치심으로 상대와의 관계를 단절해 버리는 것으로 도망쳤다.
이렇게 미숙한 내가 상담을 해도 될까 하는 두려움이 몰려올 때가 있었다. 초보 상담사 때는 그 두려움에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며 성숙해질 거라는 기대를 하거나 적어도 가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이런 고민을 해오고 상담의 연차가 쌓이며 이제는 조금 달라질 법도 한데 여전히 문제 앞에서 나는 미숙하다. 미숙하지 않다는 건 내가 세운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그런데 그 기준에 피식 웃음이 난다.
그 기준이란 게 우리가 알고 있는 성인을 합해놓은 수준이니 말이 안 된다. 자애롭고, 현명하며, 지혜롭고, 능력도 있어야 한다. 흔들리지 말고 강건해야 한다. 이런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기준에는 나는 항상 미숙한 사람일 뿐이다. 내 기준을 낮추는 것보다는 내가 미숙한 인간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 더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