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놓쳤을 때 우리는 많이 아쉽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면 아쉬움뿐만 아니라 화가 나기도 한다. 그것을 놓쳐버린 자신에게, 그것을 놓치도록 한 누군가에게, 기회를 놓치게 한 하늘까지 원망한다. 놓친 것이 기회이든, 물건이든, 사람이든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놓쳐버리면 놓친 것이 아쉬워, 그 아쉬움에 놓친 것에 집착하게 된다. 다시 오지 않을까? 놓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으며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눈길을 돌리지 못한다.
다른 이야기지만 사회 초년생 때 버스를 타고 출근을 했었다. 집에서 직장까지 가는 버스가 1대밖에 없어 버스가 늦게 오면 지각할까 봐 노심초사했었다. 그 버스는 내가 타는 정류장을 오기 전에 상습 정체 구간을 지나서인지 간혹 버스가 많이 늦었었다. 그럴 때면 모든 신에게 빌려 버스가 빨리 오기만을 빌었던 기억이 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렸기에 버스가 도착하더라고 이미 벗는 만원이었다. 그러나 다들 그 버스를 반드시 타야 했다. 그런데 어쩌다 기사님의 판단에 더 이상 사람을 태울 수 없다고 생각하면 정거장을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있었다. 저 멀리 버스가 오는 것을 보며 반가움과 안도감은 잠시뿐 버스가 눈앞에서 지나쳐 버리는 걸 보고 있자면 그 낭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황당함과 당황스러움에 이어 큰일 났다는 생각에 버스 뒤꼭지를 바라보며 망연자실 서 있게 된다. 그렇게 떠난 버스를 바라보다가 떠난 버스와 같은 번호의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한 지 못 볼 때가 있었다. 심지어 그 버스마저도 떠난 후에 발견하게 되면 원망과 함께 나 자신에게 화가 났던 기억이 생각난다.
이미 놓쳐버린 것은 빨리 잊고 눈을 돌려야 다시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이 기회든, 물건이든, 사람이든 말이다. 자신이 상실한 것을 인정하게 되면 상실된 것에 빈자리가 생긴다. 빈 곳이 있어야 다른 것이 오더라도 있을 자리가 생긴다. 누군가를 상실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떠난 그 사람을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면 현실에는 그 사람의 빈자리가 있지만, 마음에 빈자리는 없다. 현실의 빈자리를 누군가가 채운다고 하더라도 마음에는 자리를 잡지 못한다.
다시 돌아가면 무언가를 놓쳤을 때 아쉬움은 당연하다. 하지만 정류장에 버스가 떠나야 새로운 버스가 들어오듯이 나에게 새로운 무언가가 반드시 올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기회일 수도 가능성일 수도, 누군가일 수도 있다. 내가 나 자신에게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