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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을라 Jul 29. 2024

씨줄과 날줄로서의 철학ㆍ사회과학(제3편)

「복잡함(complexity)」 개념에 관하여:‘보라색’과 ‘소’

    오늘 중점적으로 말씀드리려는 것은 ‘언어의 자의성’과, 그것 때문에 필요한 엄밀함, 그리고 복잡함을 예방하고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조건(condition)’입니다. 어려운 키워드 같죠? 아래에서 재미있게 풀어 쓸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조건은 철학에서도, 사회과학에서도, 컴퓨터공학에서도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1. 엘리엇의 황무지:“나는 죽고 싶어.”


    여러분은 ‘4월은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lest month…)’로 시작하는 엘리엇의 〈황무지(The Waste Land)〉를 아시나요? 20세기 영미문학을 조금이라도 접한 분들에게는 익숙한 시(詩)일 것입니다. 어쩌면 일반 대중들께도 4월이 잔인하다는 것인지 궁금증을 품게 했을 유명한 것이지요. 뒤의 내용은 모르더라도 문장만 기억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저의 아버지도 포함해서요.)


    그런데 실제 시(詩)는 문장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저것보다 앞선 문장이 하나 있거든요. 그것도 아주 이질적인 부분입니다. 심지어 영어로 된 문학 작품임에도, 라틴어와 헬라어(그리스어)가 섞여 쓰였습니다. 내용은 아래와 같이 짧습니다.


     쿠마에의 시빌이 단지 안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것을 본 소년들이 말했다. (Nam Sibyllam quidem Cumis ego ipse oculis meis vidi in ampulla pendere, et cum illi pueri dicerent:)

     “네가 무엇을 원하는가?”(Σιβυλλα τι θελεις;) 

     그녀가 답하길(respondebat illa:)

     “나는 죽고 싶어.”(αποθανειν θελω.)


    정말 짧은 문장이지만, 이 자체로 궁금증이 여러 가지입니다. 왜 영어 작품에서 굳이 라틴어와 헬라어가 번갈아 쓰였는지, 쿠마에는 어떤 장소인지, 시빌이라는 사람은 어떻게 작은 단지 안에 들어가 있는지. (혹시 말하는 작은 동물이 아닐까?) 끝으로는, 그녀가 스스로 죽음을 원하게 되었는지. (근데 왜 또 자살하지는 않는지?)


    물론, 엘리엇이 자신의 지적 수준을 약간 과시하고 싶어서 저 문장을 쓴 것도 있습니다만, 저것은 문학적 장치입니다. 4월이 왜 잔인한 달인지에 대해서는, 저보다 훨씬 뛰어난 문학 전공자 분들의 해석이 많습니다. 그것들을 찾아 보십시오.


    저는 여기서 ‘조건’의 중요성을 전달하고자 합니다. 저 무녀 이야기에는 종교학적인 배경지식이 필요합니다. (전 종교학 전공자가 아닙니다만, 영어영문학 전공자로서 이 부분은 설명할 수 있습니다.)




    쿠마에는 오늘날 이탈리아 반도에 있엇던 그리스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리고 시빌(Sibyl)이란 여성은 로마에서 알아주던 무녀(무당)이었고, 혁혁한 활약으로 그 명성이 로마의 신들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태양신 아폴론이 그녀를 기특하게 여겨 소원을 무엇인지 물었고, 신의 권능으로 그것을 이뤄주겠다 약속했습니다. 시빌은 거기에 “저는 영원한 삶을 바랍니다”라 덜컥 답하고, 아폴론은 그 소원을 이뤄주고 떠납니다.


    그런데, 시빌의 생각은 짧았습니다. 자신의 소원을 뒷받침할 적당한 조건을 살피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삶이 의미 있는 것은, 영원한 젊음이 뒷받침되었을 때였습니다. 영원한 젊음의 조건이 만족되지 못 한 삶은 생각 이상으로 고통이었겠지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전달하려면, “아폴론님, 저에게 영원한 삶을 주세요. 정신과 몸이 영원히 젊은 상태로요.”라 말했어야 했습니다.


    시빌은 세월에 따라 늙어 가기만 했고, 죽지도 했습니다. 결국 쪼그라들어서 단지 안에 들어갈 정도로 작아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나마 인간으로서 의식이 있을 때 말합니다. “차라리 죽고 싶다.”라고요. 근데 또 스스로가 원했던 영원한 삶 때문에, 자살도 못 하게 되었습니다. 아폴론은 이미 오래 전에 떠나갔습니다.




2. 「복잡함」-­「어려움」의 차이


    「복잡함(complexity)」이란 말은 「어려움」과 혼용되기도 합니다. 많은 분들께서 “복잡한 것이 어려운 것이랑 뭐가 다르죠?”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일상에서 이 둘은 섞여 사용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 일은 복잡해.”나 “이 일은 어려워.”나 매한가지로 보입니다. 일상생활은 고도의 엄밀함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더 다양하게는, “이 일은 힘들어.”, “이 일은 아주 골치 아파.”와 같은 말도 비슷한 상황에서 의미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을 구분해 말하고자 합니다. 「복잡함」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얽히면서 본래의 의미를 알기 힘들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복잡계(complex system)’ 같은 학문 영역도 이런 성질을 가리킵니다. 「어려움」은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 질적으로 높은 수준의 지식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둘 모두 교집합ㆍ합집합을 이루면서 사용되기 때문에, 엄밀한 구분 없이는 이해가 힘들 수 있습니다.


    복잡한 일은 실타래, 어려운 일은 과학 논문 쓰기에 비유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여기서 꺾쇠기호(「」)를 두른 표현은 모두 이와 같이 구분된 것임을 알아주세요.     




3. 언어의 자의성:우리 언어 세계의 좌표계


    저는 앞서서 ‘보라색’‘소(牛)’를 비교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언어의 세계에는 꼭 그래야만 한다는 필연적인 이유가 없습니다. 좀 더 학문적으로는, 「언어의 자의성(恣意性)」이라 합니다.     


    우리는 ‘잔’을 가리켜 ‘잔’이라 하고, ‘열쇠’를 가리켜 ‘열쇠’라 합니다. 어느 새인가 불쑥 외래어가 등장해 ‘컵’이라 부르기도 하고, ‘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근데 이상합니다. 왜 우리나라는 잔을―그러니까 〈차나 커피 따위의 음료를 따라 마시는 데 쓰는 작은 그릇으로, 손잡이와 받침이 있는 것〉을 하필 ‘잔’이라 부를까요? 영미권 사람들은 왜 컵을―〈물이나 음료 따위를 따라 마시려고 만든 그릇〉을 ‘컵’이라 부를까요?     


    엄밀히 말하면 둘은 같은 게 아닙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니, 이 부분에 있어서는 ‘잔’‘컵’보다 더욱 구분된 것이네요. (‘컵’에는 손잡이가 없어도 되니 말입니다.) 올림픽 등에서 상으로 받게 되는 ‘우승컵’‘우승잔’이라 한다면 어딘가 이상합니다. 앞서 말했듯 ‘차키’‘차열쇠’라고 부르면 또 어색합니다. 두 어휘 쌍은 서로 교집합을 이루는 부분도 상당하지만, ‘손잡이가 있는지 없는지를 엄밀하게 따지면(조건) 분명 독자적인 영역도 누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작가인 제가 여기서 대충 기존에 없던 말을 하나 지어 보겠습니다. 술자리 ‘갹(醵)’을 쓰고, 잔 ‘배(杯)’를 써서, 특히 큰 컵을 임의로 「갹배(醵杯)」라는 새로운 표현으로 부르기로 한다 가정해 봅시다. ‘갹배’는 순전히 저만의 언어 세계에서 지금 정립된 기호로서, 컵 중에서도 특히 넉넉해서 많은 음료를 마실 수 있는 크기의 컵을 가리킨다고 칩시다.


    “커피 좀 마실 수 있게 컵 좀 주세요.”를 제 마음대로 바꾸어 “오늘은 커피를 많이 마시고 싶어요. 어제 늦잠을 잤거든요.”라면서, “죄송한데 갹배(醵盃) 좀 주시겠어요?”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십중팔구 상대방은 “뭐라고요?”라고 되물으며 재확인해 올 것입니다. 이런다고 “갹배 말이예요, 갹배.”, “어제 제가 정수기 위에 올려놨거든요…. 거기 없나요?”라 설명해 봤자, 정확한 의미전달은 힘듭니다. 상대방이 눈치가 아주 빠르다면, ‘정수기 위 물건’을 찾아 “혹시 이 큰 컵 말씀하시는 거예요?”라고 되물어 올 것입니다. 그래도 이것은 효율적인 대화는 아닙니다.     


    언어학계에서 말하는 ‘언어의 자의성’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언어의 형태(발음과 글꼴)과 인간이 가리키려는 대상(뜻) 사이에 필연적인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한문 시간에 배운 ‘훈음’이란 말을 기억하시는지요? 더 쉽게 기억하려면, “훈­음 사이에 필연적인 이유가 없다”라고 외워도 절반은 맞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다시, 언어의 세계에는 꼭 그래야만 한다는 필연적인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언어는 표기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발음의 실수로 ‘보라색’을 ‘브라 색’으로 말하고, 표기의 실수로 ‘소’를 ‘수’로 적는다면 곤란합니다. 친구의 보라색 옷을 칭찬하려고 “너 오늘 브라 색 잘 어울린다.”라거나, “수들이 노는 풀밭”이라고 한다면 본래의 의미는 완전히 파괴됩니다. 전자는 점(ㆍ)하나의 유무에서 뜻이 갈리고, 후자는 그 위치 차이에서 뜻이 갈리는 것을 보면, 불과 점 하나의 영향력이 상당히 큰 것입니다. (맨 위의 엘리엇의 무녀 이름인 ‘시빌’에 실수로 점 하나를 더한다면…?)




4. 「복잡함」의 해결 방법으로서 조건 수립


    저는 앞서서 ‘보라색’‘소(牛)’를 비교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잔’-‘컵’의 어휘 쌍을 비교하면서는 ‘손잡이가 있는지 없는지를 엄밀하게 따지면(조건)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장대중후-단소경박을 인지하고 분류합니다. 무엇이 길고 짧은지, 크고 작은지, 무겁고 가벼운지, 두껍고 얇은지를 구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직관에 어긋나 보이는 것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래서 ‘조건’을 세웁니다. (굳이 ‘조건(condition)’이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이것이 사회과학적으로 더 나아가서는 ‘준거’, ‘기준’ 등으로도 이어지며, 컴퓨터공학 영역에서도 굉장히 비슷한 뜻으로 사용하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다 연결시킬 겁니다.)      


    ‘보라색’-‘소’의 어휘 쌍은 비교가 애초에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글자수를 기준으로 비교해 보세요.”라 한다면? 누구나 “”아, 보라색은 3글자고, 소는 1글자네요. 따라서 보라색이 소보다 2글자가 더 많고, 소가 보라색보다 2글자 더 적습니다.”라 판단할 수 있습니다.




    다음 편부터는 사회과학 입문 단계까지 다루고자 합니다. 사실 제가 글을 엄청 길게 생각하고 쓰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홈플러스 다녀 오다가 문득 “오늘은 너무 더워서 나무들도 다 죽겠다”라는 기분이 들었는데, 여기서 황무지가 연상되어서 쓰게 된 것입니다. 이 점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적당한 소재가 떠오르면 떠오르는대로, 제가 가진 지식을 다양한 것과 연관 지어서 적어나갈 것입니다. 여태까지 발행한 글도 마찬가지로, 계속 보완될 것입니다. 그 양도 늘어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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