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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을라 Aug 09. 2024

조리(條理)와 죽음에 관하여⑴

뇌(腦)ㆍ신(神)ㆍ사랑, 확장된 나

1. 괴로움에 관하여


    이것은 생각의 두서없는 토로이고, 난잡한 일기장이다.     

 

    몇몇 뛰어난 군인들에게는 일주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행군하는 특별한 기회가 주어진다. 그 고통이 꼭 지옥과도 같아서 ‘지옥주(Hell Week)’라 불린다. 피로한 몸을 따라 뇌 역시 피곤에 빠진다. 이때는 잠에 들지 않고도 꿈을 꿀 수 있는 귀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바닷가를 지나가는데 공룡이 뛰어나오는」, 「저 산 너머에서 거인들의 머리가 떠오르는」 꿈 등등이다.     


    두터운 전투화 아래에서 땀과 습기에 발이 모조리 부르튼다. 물집은 이윽고 발바닥 전체에 이르고, 꺼풀이 벗겨져 피와 진물로 범벅이 된다. 행군을 마친 군인들은 그 후에 들짐승과 같은 잠을 잔다. 이때에는 꿈조차 꾸지 않는다. 무서운 교관들도 잠을 깨우지 않는다.     


    내가 20대 초반에, 그러니까 새파랗던 시절. 한 초보 간호사를 만난 적이 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나는 그때 기진맥진해서, 숨이 깔딱거렸다. 100㎏에 가깝던 나를 업고 갈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K군 정도였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그의 널찍한 등 위에 내가 있었다.     


    간호사는 내 핏줄기를 잘 찾지 못 했다. 내 팔을 통통 두드려 보다가, 바늘을 꽂았다가 빼기를 문자 그대로 ‘7~8번’ 되풀이했다. 처음 2번까지는 머쓱한 표정을 짓던 그도, 4번이 넘어가자 점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난 당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두르지 마시고, 천천히 해 보세요.” 간호사는 꼭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리고 내가 회복한 뒤 떠나갈 때, 그에게서 몽쉘을 참 많이도 받았다.     


    K군은 장점이 많은 남자였다. 누구나 아는 명문대를 나오고, 강인한 체력과 용기에, 윤리관마저 고지식하다 싶을 정도로 뚜렷한 사람. 그의 영어는 어찌나 유창했었나. 하와이에서 있을 때에는 ‘mahu’라는 하와이 본토의 비속어를 안다며, 그에 얽힌 이야기를 해 주었었다. 아! 또, 일주일에 한 번씩은 아름다운 여자에게서 「향수가 뿌려진 편지」를 받았기에 모두가 부러워했다. (그때는 ‘썸’이란 말도 없었다.)      


    근데 그 K가 언젠가 갑자기 얼굴을 구기며 훌쩍훌쩍 운 적이 있다. 이유인즉, “내가 힘든 것은 어찌어찌 버틸 수 있는데, 내가 잘 하고 싶어도 남들은 내 의도대로 되지 않는 것이 힘들다”라는 것.     


    고통에 의연했던 사람 중 특히 꼽을 만한 사람이 베트남의 고승이었던 틱광둑 스님이다. 아마 이 부문에서는 인류사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지 않을까? 1963년 6월 11일 화요일에, 그 고승은 온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공양했다. 몸이 타올라 잿더미가 될 때까지 앉은 상태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근육이 타들어가면서 고부라지는 자연현상에마저 오로지 의지로써 꼿꼿이 항거했다.      


    예수를 창으로 찌르고 피를 맞은 뒤에야 무릎을 꿇고 기도 올린 롱기누스처럼.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잔 다르크를 화형에 처한 뒤에야 “성녀를 불태웠다”며 울었던 잉글랜드 군인들처럼. 그 베트남 전경들도, 고승이 지닌 정신세계의 힘을 지켜보고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며 연신 절을 했다.     


2. 슬픔에 관하여


    나는 태어나서 운 적이 별로 없다. 몇몇 평론가들이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 대해 해석한 가치와 같았다. 슬픔보다야 분을 떨치고 일어나자는 것이 차라리 내 삶의 원동력이었다. 사랑에 실패하여도 울기보다는 후련하게 정리하고, 그 다음날이면 정신의 날카로움을 한층 더 빛나게 갈아내고야 만다. 자기를 향해 최면을 거는 사람처럼, 스스로의 모습에 도취되었던 때도 있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울었을 때에는 대부분, 내 지혜와 능력으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현상 앞에서였다. 눈물은 꼴사납다고도 생각한다. 차라리 과학과 논리를 키워 이것을 이겨내는 것이 옳다고도 생각했다. 불합리에 징징거리는 것도 내 정신에 맞지 아니하다 여겼다.

     

3. 죽음에 관하여


    난 태어나서 죽음 직전까지 갔던 적이 2~3번 정도 있다. 가장 먼저의 일은, 1999년 12월 31일에서 2000년 1월 1일로 바뀌는 그날. 사람들은 ‘새로운 천년’이 온다면서, 보신각 거리로 나아가 거룩한 종 울림을 기다렸다. 그때, 난 열 살도 채 안 됐다. 산만하게 움직이는 인파들. 나보다 훨씬 큰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버지 손을 한 번 놓쳤다. 그러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에게 떠밀려 이리저리 실려 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 거리에서 넘어졌다! 아버지가 나를 날렵하게 낚아채서, 곧바로 일어설 수 있었다. 어린이의 인지 능력은 어른에 비해 그 수준이 낮은데, 그럼에도 곧바로 큰 충격이 전해졌다. 목덜미에 “난 지금 죽을 수도 있었다”는 소름이 따갑게 떠올랐다. 아마, 인파의 발자국에 짓밟혀 고통스럽게 죽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죽음」이란 그때부터 나에게 하나의 이슈였다.      


    나의 ‘끝’이란 무엇일까? 끝이 있다면 그 뒤도 있나? 코드가 뽑힌 청소기의 소리처럼 일시에 잦아드는가? 정말 영혼이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나?     


    우리 가족의 모태신앙이었던 천주교리에 따라, 가톨릭 신학을 배우면서 신학의 지식이 먼저 갖추어졌다. 그리고 2003년 설날에, 친척들이 모두 모여 거실에서 즐겁게 떠들 때에, 난 외할머니께서 비워 놓으신 조용한 방에 들어와 그 바닥에 팔다리를 벌리고 누워 천장을 봤다. 다음의 문장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사람은 왜 사는가?”     


    그런데 누구에게나 그날은 다가온다. 죽음에 근사(近似)한 사건이야 우리네 삶에서 꼭 한 번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나의 힘 바깥의 문제로, 타인에게 주어져 있다. 때문에 도저히 어찌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그날은 아내의 출산을 기다리며 복도에서 동동거리는 날이다. 그 뒤의 누군가에게는 아이가 유산되었음을 통보받는 얄궂은 날이다. 누군가에게는 화장실에 들어가 수돗물을 튼 채, 가슴에서 올라오는 ‘끅끅’하는 짐승 같은 신음을 물소리에 묻어야 하는 날이고,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연인께 시한부 질병을 밝혀야만 되는 날이겠지.


    가슴속에 유보된 죽음과 갈증을, 그 지독한 운명의 해갈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디까지 인간은 더듬어 나간다. 빈자도 빈자를 사랑하고 끌어안을 수 있다는 높은 경지. 슬픈 표정으로 “나 대신 그이를 살려 주세요”라 말하면서, “대신에 나는 어찌 되어도 좋습니다.”라 독백하는 단호한 눈매를 짓게 되는 날이 기필코 온다.     


    누구나 인생에 한 번은 신으로부터 사명이 내려온다. 그때는 꼭 울면서 세계를 등져야만 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모든 이가 가지 말라고 소리칠 때, 자신이 떠나가는 이유를 단 한마디 밝히지 못 하고, 담담한 척 돌아서야 하는, 너무도 신화적인 날이.     


    특히 생각해 볼 부분이 첫 출산이다. 아무리 냉정한 사람이더라도 첫 아이가 태어나면 펑펑 운다. 리처드 도킨스와 하이데거의 말마따나―한낱 ‘유전자의 그릇’이며 ‘피투성의 존재’로 세계 속에 (태어났다기보다는) 던져진 우리가, 태고적으로부터 끈끈하게 설계된 본능에 처음으로 반항한다. 아이를 바라보며 “내가 존속되지 않아도 된다” 결심하는 신비한 경험을 하고, 아무런 능력도 없이 나의 에너지를 앗아가는 아기를 아무런 기대 없이 사랑한다. 태어나 처음으로 남(他)을 나(自)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다. 내가 ‘과학적으로’ 타인에까지 이어진다. 이것이 ‘확장된 나’의 개념이다.


    이 아래에 내가 감명 깊게 읽은 논문 중 하나인, Robin L. Carhart의 〈Neural Correlates of the LSD Experience revealed by Multimodal Neuroimaging〉와, 그와 연관된 신기한 뇌과학의 소산물을 하나 소개한다.     


4. 이 글을 쓰는 이유


    왜 내가 갑자기 이런 글을 쓰는가? 요사이 뜬금없이 누군가가 아프게 되어 응급실로 실려 갔다. 차라리 내가 쓰러지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동안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 나는 나 자신에게 후회되는 것은 별로 없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빗대면 더 잘 하여야 했음을 깨닫게 되고, 후회가 연잇는다.


    신께 “하느님! 왜 강고한 나에게서 앗아 가시지 않고, 늙고 약한 자들에게서 앗아 가세요?”하고 기도로써 항의했지만, 빈 극장에서의 독백처럼 쓸쓸할 따름이었다.


    나는 가까운 사람에게, 멍청이처럼 멋쩍게 웃으면서, “ㅎㅎ 성공하는 모습을 아직 못 보여 줬는데...”하며 메시지를 보내야만 했다. 이리저리 동동거리며 주변 물건들을 건드렸다. 며칠 전 밤에 우발적으로 산 바나나송이가 문드러지고 있었음을 안 것도 이때였다.


    사랑, 삶, 죽음이 자판기 단추마냥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확장된 내가 쓰라렸다. 그리고 하루가 바뀌고 나서야 천만다행이라는 소리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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