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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 Dec 16. 2023

망한 재수 후기

이건 낫지도 않죠 더 심해져요

스물한 살, 재수를 했다. 이유는 많았다. 전공이 나랑 안 맞아서, 친구들이 서울에 있어서, 대학 사람들이 싫어서, 살면서 뭐 하나는 그래도 좀 열심히 해봤다 하고 싶어서. 그저 그런 마음은 아니었다. 엄마 아빠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마음도 많이 다쳤고 지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것 자체가 꽤나 피로한 일이었으니까. 그 모든 걸 감수하면서 내가 얻고자 했던 건 뭐였을까?


수능을 제대로 조지고 나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다가, 만다. 현역 때야 스스로에 대한 연민, 주변 친구들에 대한 열등감, 처음 겪을 일들에 대한 묘한 긴장과 설렘 같은 게 있으니 하루 온종일 머리가 핑핑 돌았지만 이젠 아니다. 대학도 1년 다녀봤겠다, 수능도 두 번째 쳐봤겠다, 하다못해 수능 망친 것도 두 번째인데, 별로 드는 감상이 없다. 그냥 아 이게 내 한계였구나, 그걸 나만 몰랐네 하는 정도.


부모님은 A 대학이 아니라면 복학을 하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어느 정도 약속한 바가 있으니 순순히 따라야 하지만, 이게 생각처럼 잘 안된다. 이것도 일종의 보상 심리인가? 돈은 엄마 아빠가 다 냈는데 나는 겨우 1년이라는 시간이 아깝다는 게, 고집부려서 한 거라 어디 따질 곳도 없을 때, 결과도 내 책임, 과정은 버려진지 오래고, 이젠 너무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런 것들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고 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그 모든 매일 속에서 나는

이게 이렇게 속상할 일인가? 서운할 일인가? 힘들 일인가? 도돌이표 찍듯 번갈아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자문은 있는데 자답이 없다.


학자금 대출을 받아 가며 겨우겨우 서울권 대학을 찍고 나면 그다음은, 등록금 싸고 가성비 좋고 다 좋은데 일단 상향이라는 애매한 지거국 그래 거기 가고 나면 그다음은, 겨우 밀어 넣은 원서 3장 전부 탈락하고 그렇게 가기 싫었던 부산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다음은. 다음은?


다음이랄 게 있나? 인생이 통째로 갈피를 잃었다. 아직 어리니까, 꾸역 꾸역 가다 보면 생기는 게 길이고, 실은 걷는 중에도 이게 길인지 모르고 걷는 거라지만 그래도. 그래도. 표지판 하나 정도는 좀 있어줬으면 했다. 이 대학 이 학과 가면 나 진짜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또 이런 말은 쉬워서 고등학교 때부터 입이 마르도록 하고 귀가 닳도록 들었지만 현실은 꼭 이상과 거리가 멀다.


괜찮지 않지만 일단 괜찮아야 하는 게 수능 망한 엔수생이다. 지나고 보면 그만큼의 청승이 없고, 또 어찌어찌 살다 보면 밥벌이도 하고, 세상 팍팍하다지만 이리저리 휩쓸리다 보면 꼭 평균 근처는 가더라. 하는 아주 작은 희망으로 괜찮아 보기. 그래도 늦은 밤까지 잠 못 드는 이유를 알 것만 같은 건 기분 탓일까.


하지만 잘 살고 싶은 마음은 여전해서 나는 보지도 않을 좋은 영화, 읽지도 않을 좋은 책, 듣지도 않을 좋은 음악을 수집하고, 가고 싶은 곳과 가야 할 곳을 늘리고, 끊임없이 욕망하고, 위시 리스트에 사치품을 주워 담고, 통장 잔고를 보면 답답하고, 새로운 일을 다짐하고 가끔은 외면하고, 누구를 원망하고 싫어하고, 실리카겔의 정규 2집을 기다리며, 내년 봄을 궁금해하고, 내 옆에 있을 누군가를 바라고, 나의 볼품없는 재능과 비루했던 노력을 기리며, 수능 다음날 서울 대치동에서 봤던 눈이 올해의 마지막 눈이라면 정말 짜증 날 것 같지,


뭐 이런 식으로 연명해 보는 십이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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