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의 집 6화

방학이라는 건 하루하루가 귀중한 것이기도 했다.

by 하이드

센터에서 민욱이를 만난 다음날은 일요일이었다. 매주 센터가 쉬는 날이었고, 나에게는 일주일 중 유일한 휴무일이기도 했다. 전날 집으로 돌아갈 때 민욱이는 내게 방학을 한 뒤로 매일 아르바이트만 하고 놀러 나오지도 않는다며 불평했다. 굳이 말하면 내가 일을 시작한 뒤 휴일은 이제 고작 두 번째지만, 방학이라는 건 하루하루가 귀중한 것이기도 했다. 마침 다음날이 휴일이라는 말은 들은 민욱이는 그럼 내일 약속을 잡자는 말을 꺼냈다. 나도 이제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있을 때였기에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일요일에 친구들을 만나 놀 계획이 세워졌다.


약속 장소는 해변가 근처에 있는 농구 코트였다. 우리 동네 근처에도 농구할 장소는 있었지만 거기가 제일 깔끔해서 좋았다. 날이 밝자 나는 느지막이 아침을 먹고 유쾌한 발걸음으로 약속 장소로 나갔다. 친구 세 명은 이미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욱이는 물론이고 규진이와 세찬이도 함께 가볍게 링에 공을 던지며 몸을 풀고 있는 상태였다.


"윤승연 빨리 좀 안 오냐?"


"시간 맞춰 나왔는데 왜? 너희가 빨리 나온 거지."


세찬이가 나를 보고 농담조로 말하자 나도 적당히 받아 쳐 줬다. 키가 커서 예전부터 농구하는 걸 즐겨온 녀석이었는데, 사실상 우리 넷이 어울리게 되면서 취미로 같이 농구를 하게 된 것이 세찬이의 영향이었다.


그때 농구공을 들고 있던 규진이가 내게 휙 패스했다. 평소 소심한 성격인 규진이는 막상 친해지게 되면 가끔 짜증이 날 정도로 장난을 치거나 속을 긁는 소리를 할 때가 있었다. 그때 나한테 건넨 말도 대충 그런 종류였다.


"요즘 여자랑 놀다 보니까 우리는 뒷전인가 보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잠깐동안 거의 정지하다시피 했다가 이내 무슨 소린지 깨닫고 움찔했다. 그리고 대뜸 민욱이를 노려봤다. 이건 겨우 하루 밖에 안 지났는데 그 새를 못 참고 입을 놀렸어? 그 자식은 즉시 우리 절친들한테만 털어놨으니 거짓말을 한 건 아니라고 변명했지만 내가 듣기엔 거기서 거기일 뿐이었다.


"너무 그러지 마라. 우리끼린데 뭐 어때?"


그 말 대로 확실히 늦든 빠르든 해나랑 같이 있는 걸 민욱이에게 보인 이상 일어날 일이긴 했다. 하지만 진짜로 둘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단순히 옆에 있었다고 이런 말이나 듣다니. 해나가 이런 걸 알게 되면 그나마 친해진 사이까지 와장창 깨질까 겁났다. 그런 복잡한 감정을 담아 민욱이 녀석에게 힘껏 농구공을 던졌다. 머리통이라도 맞출 요량으로 던진 거였는데 보란듯이 붙잡아버려 더 기분 나빴다.


"여자랑 좀 같이 있었다고 이상한 상상 좀 펼치지 마."


"네가 여자랑 있는 걸 본 적이 없다고."


"너도 없거든?"


주거니 받거니 투닥대며 자연스럽게 편을 갈라 농구를 시작했다. 사람이 적으니 반코트로, 음료수 내기도 걸고. 털어놓자면 우리 실력이 다들 좋은 편은 아니었기에 키가 큰 세찬이가 있는 팀이 아무래도 유리했다. 때문에 좀 원성이 생겼지만 그런 식으로 논 것도 하루이틀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영부영 게임은 계속되었다.


진짜 문제는 한참 몸이 달아오를 때쯤 생겼다. 처음엔 우리 중 한 명이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는 말을 꺼냈다. 당연히 이 근처는 통행이 적은 곳이 아니었기에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잠시 후 정말로 한 무리의 남자들이 코트로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얼핏 봤을 때 숫자는 대여섯 정도였고 다들 우리보다 평균적으로 덩치가 컸다. 확신까진 할 수 없었지만 풍기는 분위기로 보아 성인은 아닌 듯했다. 우리보다 한두 살쯤 많지 않을까 싶었다.


몇 초 더 지나자 정말로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게 확실해졌다. 우리를 보고 껄렁한 어투로 말까지 걸었던 것이다.


"야, 농구장 너희만 쓰냐?"


"다른 사람들은 운동도 못해?"


우리는 어리둥절해져서 대꾸도 못 하고 눈만 껌벅였다. 우리도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황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애시당초 방금 전에야 나타나고선 우리가 여길 얼마나 오래 썼는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저희도 여기 온지 얼마 안됐는데요."


그나마 우리 중 제일 건장한 세찬이가 한발 나서며 항변했다. 그래도 일단 기세부터 눌린 채인지라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세찬이가 우리 중에선 제일 키가 컸지만 몸집 큰 사람은 저쪽에도 많았다. 불량배인지 뭔지 모를 녀석들은 계속 억지를 써대며 우리더러 비키라고 위협적으로 몰아붙였다. 결국 우리는 서로 불안한 시선을 주고받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도리 없이 코트를 내주게 되었다. 더 버텨봤자 득 될 게 없었다. 이러다 혹여나 몸싸움이라도 벌어진다면 더욱이.


그렇게 순순히 물러나긴 했지만 꼬랑지 만 개라도 된 것처럼 초라한 기분이었다. 내기해서 진 팀이 사기로 했던 음료수는 각자 돈으로 하나씩 사 들고, 편의점 근처 정자에 앉아 홀짝댔다. 그동안 우리끼리 그리 많은 말이 오가지는 않았다. 기껏 오랜만에 친구들이랑 놀러 나왔는데 이게 무슨 꼴이람.


"그 사람들 고등학생이었나?"


"한 명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우리 학교 학생인가?"


"자기들이 무슨 깡패도 아니고."


듣는 귀 없는 곳에서 욕을 하고 있으니 기분은 좀 나아지긴 했는데 기껏 친구들을 만나 놓고 할 일이 없어지고 말았다. 본래는 농구 좀 하다가 배고파지면 같이 점심이나 먹고 헤어질 계획이었다. 그게 붕 떠버린 것이다. 오늘은 재수없는 날인 셈치고 그냥 들어갈까 하는 말까지 나오던 중, 규진이가 시내로 나가서 영화나 한 편 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


처음엔 다들 좀 미적지근한 반응이긴 했어도 설왕설래가 좀 돌다 보니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는 결론으로 수렴되어갔다. 우리는 잡쳐버린 기분이나 달랠 겸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그 와중에 이제는 내게 익숙한 장소가 된 문화 센터도 창밖으로 지나갔다. 지금은 용건이 없는 건물에 불과했으므로 별다른 감상이 들지는 않았다. 그 길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극장 앞에 도착했다.


이왕 기분 풀 작정으로 왔으니 시원하게 나쁜 놈들을 해치우는 액션 영화로 정했다. 여기 오는 것은 충동적인 결정이었음에도 특별한 이견 없이 만장일치로 정해진 결과였다. 영화 내용도 기대만큼이나 화려한 볼거리가 쏟아졌기에 농구장에서 있었던 일은 금세 잊힐 정도였다. 2시간여가 흐른 후, 단순한 십대인 우리 네 명은 멋있는 영화 주인공이나 따라하며 왁자지껄 극장을 나오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시내까지 왔겠다, 배도 고파지고 있었으니 이제 적당히 밥이나 한 끼 사먹고 들어가면 딱 맞을 것 같았다. 중간에 기분 나쁜 불상사가 섞이긴 했지만 마무리는 원래 계획대로 할 수 있게 됐다. 거기서 끝나기만 했다면 괜찮은 하루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극장에서 나와 식당으로 이동하는 중에 안 봐도 됐을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쇼핑센터 지하 푸드몰을 목적지로 잡고 에스컬레이터를 탔을 무렵이었다. 그 지하에는 학생들 용돈으로도 그리 부담 없는 괜찮은 가게가 많았다. 내가 일행 중 가장 선두에 서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깔끔한 통로 쪽으로 한 걸음 내딛자 문득 저 앞에서 웃고 떠드는 남녀가 뒤섞인 한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또래처럼 보이긴 했는데, 그것만으로 내가 눈길을 빼앗기진 않았을 것이다. 그들 중 낯익은 사람이 한 명 섞여 있어서 그랬다.


여자 셋에 남자가 둘이었다. 그리고 여자 셋 중 하나는 다름아닌 해나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 그 자리에 멈춰서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해나도 마찬가지로 즐거운 표정이었다. 남자 한 명이 무슨 농담을 하자 웃음을 터뜨리며 주먹으로 어깨를 툭 치기까지 했다. 그 즈음 남자 두 명도 낯선 얼굴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떠올리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본 지 기껏 몇 시간 밖에 지나지 않은 녀석들이기 때문이었다. 그 둘은 우리한테 농구 코트를 빼앗았던 그 무리에 속해 있던 놈들이었다.


왠지 가슴 한켠이 싸하게 달궈지는 듯했다. 그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처음이라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모습을 보기 싫으면서도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나랑 같이 있을 때와는 달리 해나는 활기찼고, 목소리가 컸고, 크게 웃었다. 저게 진짜 얼굴일 것이다. 나야 그냥 어쩌다 같이 일하게 된 사이였으니 적당히 대해준 것일 테니까. 실망할 것도 배신감을 느낄 것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너무 빤히 바라봤는지도 모르겠다. 해나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멈칫하고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한순간 멀찍이 떨어진 나와 눈이 마주쳤다. 해나의 두 눈 속에서 적잖은 당혹감이 느껴졌으나 확신할 순 없었다. 그러자마자 나도 고개를 휙 돌려버렸던 것이다.


뒤통수가 간지러웠지만 다시 그쪽을 쳐다볼 자신은 들지 않았다.


"너 뭐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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