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따져 본다면 지금 느끼는 이 감각이 정상이었다.
내가 너무 티 나게 멍하니 서 있었던 모양이다. 바로 뒤를 따라오던 민욱이가 어깨 위로 고개를 쑥 내밀더니 방금 전까지 내 시선이 머물던 방향을 보았다. 민욱이의 머리통을 돌려버리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나랑 똑같이 해나와 그 무리를 목격한 민욱이는 아, 하고 짧게 탄식 비슷한 소리를 뱉었다. 그러자 이 입 싼 녀석이 또 무슨 말을 할지 불안해졌다. 하지만 불안과 다르게 민욱이는 불쌍하다는 듯 내 등을 툭툭 치고는 뒤따라오는 세찬이와 규진이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어딘가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부터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푸드몰에서 사먹었던 새우덮밥이 무슨 맛인지도 잘 못 느꼈다. 짧게 마주쳤던 해나의 눈이 자꾸만 어른거리고 떠나질 않았다. 그 눈빛에서 아주 짧은 시간 목격했던 당혹감을 되새겨보려 했지만 애초에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는지도 의심스러웠다. 하필이면 해나가 같이 있던 게 우리에게서 농구 코트를 빼앗은 자식들이라는 게 자꾸 생각을 가로 막아서였다. 영화를 보고 털어냈다고 여겼던 불쾌한 감정이 배는 커진 채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유치하게 영화 주인공을 흉내내며 악당들 해치우는 영웅처럼 놀았던 것까지 떠올리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실제로 부당한 일을 겪었을 땐 바보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꼬리나 만 주제에. 왜 오늘 겪은 모든 일들은 그렇게 돌아가야 했을까.
집에 돌아올 때까지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말도 별로 안 하고 저녁도 건성건성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일찌감치 방으로 들어와 잠을 청했다. 내일은 또 한 주가 새로 시작되는 월요일이다. 다시 일을 하러 나가야 된다.
아침에 일어나 시내로 향하는 길에 올랐을 때 묘하게 몸에 기운이 빠지는 나를 발견했다. 지금까지는 없던 일이었다. 출근한 다음에 해야 될 일에 대해 생각해봤다. 오늘 있을 미술 수업은 무거운 이젤을 스무 개나 옮겨야 된다. 지난번에 같은 수업을 했을 때 수강생 한 명이 물감을 쏟는 사고가 일어나 열심히 닦다가 옷을 버렸던 것도 떠올랐다. 오늘 이전까지는 그런 일들까지 포함해서 이 아르바이트가 그저 한 덩어리의 재미있는 활동 같았는데, 지금은 갑자기 고된 노동처럼 느껴졌다. 그것 참 이상한 노릇이었다.
오늘은 여느 때처럼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문화 센터까지 가고 있었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해나의 얼굴이 점층적으로 또렷하게 머릿속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별로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그냥 시내에서 한 번 우연히 마주쳤을 따름이다. 내게도 친구가 있듯이 해나에게도 따로 자기들끼리 어울리는 무리가 있는 거다. 그런 데서 편한 모습을 보이는 걸 본 게 뭐가 그리 특별한 일이라고 나는 지금 이러고 있는 거지?
그냥 하던 대로 대하자. 어차피 처음부터 그냥 우연히 일터에서 만난 관계였잖아. 이 일이 끝나고 학교도 개학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복도에서 마주친다면 어쩌다 인사나 한 번 하게 될 그런 사이에 불과할 뿐이니까.
도착하고 보니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각이었다. 이런저런 잡념들이 많아서 나도 모르게 걸음이 늦어졌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늦게 걷고 싶었거나.
이제는 일상처럼 2호 강의실로 걸어 들어갔다. 내가 늦게 온 만큼 해나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나를 보더니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든다. 나도 마주 인사를 건넸다. 내 웃음이 어색하게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했던 걱정이 씨가 되기라도 했는지, 그날 첫 번째로 진행된 미술 수업에서는 또다시 수강생이 물통을 엎지르는 실수가 발생했다. 저번에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땐 내가 먼저 괜찮다고 너스레를 떨며 행주로 바닥을 닦아냈지만 오늘은 그런 태도가 자연스럽게 나오질 않았다. 오히려 속에서 치미는 짜증을 꾹꾹 눌러 참으며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내 그런 상태가 계속되자 해나도 오늘 내가 어딘가 다르다고 느낀 건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기도 했다.
"너 오늘 기분이 좀 안 좋아 보여.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괜찮아."
너랑 어제 마주쳤던 일이 자꾸 신경 쓰여서 그렇다는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하고, 정작 당사자인 해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얼마나 이상하게 들릴지도 선하다. 그것과 별개로 해나는 어제 시내에서 나와 눈이 마주쳤던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역시 눈이 마주쳤던 것은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나마 점심시간 전까지는 평소보다 약간 가라앉은 감이 있어도 큰 차이는 없었다. 오전 수업 두 개가 끝나고 점심을 먹을 때가 되었을 때 해나는 날 보며 물었다.
"위에 올라가서 점심 먹을 거지?"
위라는 것은 물론 파라솔을 가져다 놓은 옥상을 말하는 거였다. 옥상에 파라솔을 갖다 놓고 거기서 노닥거리게 된 후로는 편의점에서 음식을 사다 거기서 먹고 남은 시간을 때우다 오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래서 해나도 자연스럽게 같이 올라가자고 말을 거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해나는 내가 그렇게 반응할 줄 전혀 몰랐다는 듯 말 없이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놀랄 만도 하다.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으니까.
일단 한 번 거절 의사를 밝히고 나니 주워담고 싶지도 않았다. 오늘 이 시각까지는 일을 하는 상황이어서 굳이 해나랑 긴 말을 나누지는 않아도 됐다. 그래서 불편한 심기를 감추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파라솔 밑에서 같이 점심을 먹는 건 다른 얘기였다. 아직까지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지도 못하는 와중에 단둘이 있게 되면 내가 도무지 태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오늘은 속이 안 좋아서. 주변 산책이나 좀 다녀올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혼자 먹어."
해나는 어딘가 석연찮은 듯 내 얼굴을 흘끔댔지만 결국 대답했다.
"알겠어."
나는 정말로 40분 내내 산책을 하게 되었다. 그 더운 날 다리를 움직이며 쓸데없이 이리저리 튀어다니는 마음을 통제하려 해봤다. 그렇게 잘 되지는 않았다. 그나마 오전만큼 내내 뚱한 얼굴로 돌아다니지는 않을 수 있을 듯했다. 의외로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을 통감하며 때를 맞춰 다시 센터 건물로 들어갔다.
오후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업무 역시 순조로웠다. 적어도 아까보다는 해나의 얼굴을 마주보는 게 수월한 듯했다. 그렇기는 해도 완전히 태연하게 돌아가는 건 쉽지 않아서, 그날 초저녁 일이 끝나는 대로 나는 건물을 부리나케 빠져나와 귀갓길에 올랐다. 평소처럼 옥상에 올라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한숨 돌리고 가는 게 아니라 바로 나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나도 마냥 태연하게 굴고 싶었는데도 해나와 단둘이 앉아 자연스럽게 잡담을 나누던 나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고작 이틀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대체 무엇이 달라진 거지?
집으로 가는 길. 한낮에 비해 더위가 한풀 꺾이긴 했지만 가로등이 점점이 늘어서고 노을이 깔린 해변가 도로를 걷는 기분은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낭만적인 감상을 주지 못했다. 굳이 따져 본다면 지금 느끼는 이 감각이 정상이었다. 여긴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였다. 이 길은 익숙했고 바닷가나 파도 소리 같은 건 지구 어디에서나 부는 바람만큼이나 익숙한 것들이었다. 매일같이 지는 노을을 보면서도 무엇보다 아름답다는 감상에 빠질 수도 있는 게 사람이라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날, 생애 첫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문화 센터에 왔다가 이 길을 따라 돌아갔던 날은 정체 모를 마법에 걸렸던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그토록 낭만적이었을 수밖에.
오늘은 달랐다. 낭만은커녕 무언가 가슴 밑에 깔린 답답함만이 가득했다. 스스로도 무엇이 깔린 것인지 정체를 알 수가 없어 답답함은 한 걸음마다 심해지는 중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단 걸음을 멈춰 보기로 했다. 길어진 내 그림자를 바라보며 저녁 공기를 깊게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잠깐 해변 쪽을 흘깃 바라본 나는 방향을 약간 바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들를 곳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