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의 집 8화

적시기 싫었다. 너무 가까이 가지 않으면 젖을 일도 없는 법이니까.

by 하이드

좀 더 해변에 가까운 곳으로 내려갔다. 길가 어귀에 나만 알고 있는 개구멍이 하나 있었다. 입구는 기어들어가야 될 정도로 좁지만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면 허리를 약간 숙이고 걸을 수 있을 만한 통로가 나온다. 그대로 들어가면 차츰 커지는 파도 소리. 마침내 작달막한 내 비밀 해변이 펼쳐진다.


방금 전까지도 계속 혼자였는데도 이 안으로 들어와 서자 제대로 진정이 된다고 느껴진다. 그 이유는 여긴 진정으로 남이 침범하지 않는 공간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새삼스럽진 않더라도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집중하고 있자면 마음만은 신묘하게 한 단계씩 가라앉았다.


철썩, 철썩, 솨아…….


바닷바람과 물기, 해식절벽이 드리우는 그늘 덕에 아스팔트 도로 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시원한 기운이 가득했다. 뾰족한 돌들이 깔린 위치를 벗어나 해변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걸었다. 언제나처럼. 하지만 밀려오는 파도로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그저 바닷물이 닿지 않을 위치에 멀찍이 물러나 이리저리 왔다 가는 파도를 쳐다보기만 했다.


신발을 적시기 싫었다. 너무 가까이 가지 않으면 젖을 일도 없는 법이니까.


오랫동안 의자로 사용해온 바윗돌에 걸터앉았다. 가방을 뒤져 요즘 읽고 있는 책 한 권을 꺼냈다. 파도와 바람을 배경음악 삼아 한 페이지씩 읽어 내려갔다. 방학이 시작했을 무렵부터 읽기 시작한 탐정 소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초저녁까지 일을 하다 오는 일정 탓에 아직 중간까지도 못 읽은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앞서 어떤 단서들이 나왔고, 탐정이 어떻게 범인을 추적해 나가고 있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면 소설 속 탐정들은 정말 대단하지. 나는 기억하기만도 벅찬 사소한 단서들만 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난해한 수수께끼들을 척척 풀어내는 걸까. 문득 나도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든 내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슥 훑어보기만 하는 것으로 뭐든지 알아낼 수 있다면, 뭐든 답답한 심정을 느끼지 않아도 될 텐데…….


몇 페이지나 더 읽었을까.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사위는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곧 책을 읽지 못하게 될 테니 이제야 말로 일어나서 집으로 갈 시각이었다. 어제와 오늘 있었던 일들이 그제야 명료하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친구들 앞에서, 그리고 내 마음속에서, 계속 아니라고 손사래만 쳤지만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때 같았다. 나는 해나를 좋아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나하고 다른 부류의 친구들과 어울리고, 그들 사이에서 편해 보이는 모습을 보고 참담했던 거다. 그냥 별것 아닌 인연이 생겨 잠깐 잘해 준 것 가지고 멋대로 펄럭였던 마음이 너무 부끄러워서 스스로가 바보 같아 숨으려 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도 이제 그 애를 대하는 태도를 똑바로 정해야 될 때가 왔다.


기껏해야 한 달 남짓. 그만큼만 어울리는 거다. 굳이 쌀쌀맞게 대할 것도 없지만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질 필요도 없다. 그 기간이 끝나고 나면 그저 같은 학교 다니는 얼굴만 좀 아는 친구. 그 정도로 돌아가는 것이 적당했다.


원래부터 내 위치는 그냥 그 정도였을 테니.




화요일. 새벽부터 굵은 비가 내렸다. 공교롭게도 내가 집을 나설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8월 장마가 시작되는 조짐이 보인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센터 건물 출입구 앞에 동그란 우산 꽂이가 놓였다. 궂은 날씨 탓에 평소보다 수강생 출석 숫자가 줄었다. 그만큼 착 가라앉은 우울함과 축축함이 만연한 날이었다. 강의실 창문으로 세찬 물방울이 부딪혀 시야를 흐렸다. 투둑투둑 묘한 리듬감을 지닌 소음을 만들어냈다.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줄었다. 원래도 그리 힘든 아르바이트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수업 중에는 틈을 타서 잡담이라도 나누려 하다가도 한 번씩 자리에서 일어날 일이 생기는 편이었다. 오늘은 소리만 충분히 낮춘다면 강의실 뒤편에 앉은 나와 해나는 내내 대화를 하며 무료함을 달랠 수 있을 정도였다.


그건 생각을 하긴 했지만 내가 먼저 말을 걸지는 않았다. 내가 약간 뻣뻣하게 자리에 앉아 있는 사이 해나가 먼저 상체를 살짝 숙여 내게 속삭였다.


"오늘 비 진짜 많이 오네."


"그러게."


"언제쯤 그치려나?"


"일기예보에선 하루종일 온다고 하던데."


"내일도?"


"내일까지 올 수도 있대."


그 말을 들은 해나의 표정이 미묘하게 어두워지는 게 보였다. 그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점심시간에 밝혀졌다.


"위에는 어떡하지?"


"무슨 소리야?"


내 무심한 말투에 해나는 미간을 좁히더니 톡 쏘듯이 얘기했다.


"파라솔이랑 의자 말이야! 우리가 갖다 놨잖아! 비 때문에 망가지면 어떡해!"


"아…… 다른 직원들이 이미 어떻게 하지 않았을까?"


"아닐 수도 있잖아."


"비 좀 맞는다고 어떻게 될 것 같진 않은데. 날 개면 다시 마르겠지 뭐."


내가 너무 건조하게 반응한 걸까. 해나는 눈썹을 뾰족하게 세우고선 양손을 허리 위에 얹고는 말했다.


"그 무거운 걸 들고 옥상까지 나른 건 너면서 되게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그 말에는 나도 대답할 말이 궁했다. 엉겁결이긴 했지만 난처해서 웃음도 나왔다.


솔직히 해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작은 비라면야 걱정할 일 없더라도 지금도 창문을 후두둑 때리고 있는 빗줄기는 제법 굵었다. 바람이라도 세게 불어서 기껏 올려놓은 물건들이 못 쓰게 될지도 모를 일이긴 했다.


그래서 점심시간이 되자 우리는 바로 옥상 위로 올라갔다. 혹시나 했는데 우리가 열심히 올려놓았던 물건들은 정말 그대로 방치되어 처량하게 빗줄기를 얻어맞고 있는 중이었다. 아까 전엔 다소 시큰둥하게 굴었던 나도 그 모습을 보자 얼른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우산을 쓰긴 했지만 장대비 아래서 그것들을 끌어내 옮기는 건 마음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본의 아니게 양어깨를 잔뜩 적셔가며 겨우 비가 닿지 않는 곳으로 가져다 놓았다. 파라솔은 접어서 눕혔고, 의자들은 차곡차곡 쌓아 곁에 두었다. 축축한 습기는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일단 비바람에서 벗어나게 했으니 날씨만 개면 다시 물기를 말려 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옆에 있는 해나를 보았다. 젖은 머리를 한 손에 감고 있었는데 얼굴을 보아 지금 이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 듯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바닥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물어봤다.


"밥 먹으러 갈 거야?"


해나는 얼마간 생각하는 기색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대답은 예상 외였기에 나는 속으로 움찔했다. 표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다시 말했다.


"왜?"


"속이 안 좋아서."


그렇게 읊조린 해나는 거의 해파리를 연상시키는 몸짓으로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복잡한 기분이 되어 그 자리에 얼마간 서 있었다. 그 말의 저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왜 해나가 내가 어제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할까? 어제 자리를 피하고 싶어 내가 댄 핑계였다는 걸 눈치채고 저러는 걸까? 하지만 그것이 내 행동을 똑같이 따라할 이유가 된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설마 평소 성격대로 지는 걸 싫어해서 저러는 걸까?


그 짧은 대답 한 번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도무지 모르겠다. 비단 이번 한 번뿐만이 아니라, 해나를 만난 이래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기준으로 행동하는지 제대로 알 것 같다고 느낀 적이 거의 없었다.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닌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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