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의 집 9화

8월의 늦장마가 올 거라던 예보는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by 하이드

그런 감정의 미묘한 일련의 흐름은 퇴근 때까지 이어졌다. 오늘 우리는 모든 커리큘럼이 끝나는 오후 5시까지 센터에 붙어 있었다. 그런데 하늘은 내내 우중충하기만 해서 창문 밖을 보는 걸로는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은 왠지 멍하게 있는 시간이 긴 날이기도 해서 중간에 한 번씩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면 한 시간이 지나 있고, 두 시간이 지나 있고, 그런 식이었다.


그런 날이어도 시간은 간다. 언제나와 똑같았지만 다른 마음가짐으로 일을 마무리하고 강의실을 나섰다. 해나랑 같이 1층 밖으로 나와서 우산을 펼치기 직전이었다. 해나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것까지는 별일 아니었지만 똑바로 나를 쏘아보는 눈빛에 나는 멈칫했다. 적어도 오늘은 처음 받아보는 종류의 눈빛이었다. 그렇게 나를 바라보며 해나는 대조적으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나랑 있었던 남자애들…… 내 친구 아니야."


"뭐라고?"


"그저께 시내에서 말이야. 여자애들은 내 친구였지만 남자애들은 아니었어. 내 친구 남자친구의 친구들…… 아무튼 아무 사이도 아닌데 어쩌다 같이 있게 된 거야. 친구의 남자친구니까 그 앞에서 뚱하게 있을 순 없잖아. 걔네들 별로 좋은 녀석들은 아닌데, 친구한테 대놓고 헤어지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그래서……."


왠지 갈수록 말이 길어졌고 나중에는 궁색하게 들릴 정도가 되었다. 해나도 중간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애매한 지점에서 말을 끊고 입술을 짓씹었다.


혼란스럽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더하면 더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날 해나와 눈이 마주쳤던 건 내 착각이었다고 저 혼자 결론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때 일에 대해, 변명조로 들리기까지 하는 말을 듣고 있으니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그래서 당황한 나머지 그런 소리를 내뱉었던 것 같다. 그러자마자 후회했지만 말을 주워담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나랑은 상관없는 일 아니야?"


해나의 얼굴이 확 붉어지는 게 보였다. 시선까지 이리저리 분주히 오갔다. 내 생각 없는 말이 불러온 반응에 나 자신이 놀라고 있는 사이, 해나는 내게서 고개를 돌리더니 들고 있던 우산을 활짝 펼쳤다.


그때까지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아까부터 해나는 한손에 검은 다이어리를 들고 있었다. 해나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는 그 다이어리였다. 왜 이런 타이밍에 그런 것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랐다. 우산을 펼치기 전에 잠깐 나에게 내밀려고 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그냥 착각일 수도 있었다. 해나는 그저 그 다이어리를 재빨리 가방에 감추듯 넣어버렸을 뿐이었으니까.


"그렇네. 상관없구나. 이상한 헛소리나 해버렸네."


순간적으로 굉장한 실례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도 정확히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이해를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내 머릿속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동안 해나는 이미 비가 내리는 지붕 밖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미안해. 내일 보자. 비 오니까 감기 조심하고."


그런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해나는 내 눈앞에서 천천히 걸어 사라졌다. 어쩌면 잡아야 될지도 모른다는 충동이 솟았고 실제로 한 발이 움직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이상 움직이지 못한 것은 잡고 나서 내가 뭘 해야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발걸음을 재촉해 해나를 따라잡는다, 이름을 불러 멈춰 세운다. 그럼 그 다음은? 다음은 무슨 말을 해야 되지?


모르겠다. 그래서 해나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유 모를 부끄러움이 밀려와서 걸음도 내딛기 어려웠다. 다시 비밀 해변이라도 찾아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아직까지 비가 그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일기예보가 정확하지 않다고 불평을 늘어놓은 적이 자주 있었다. 화창할 거라고 한 날에 느닷없이 비가 쏟아진다거나 그 반대의 경우를 충분히 겪어봤다. 아마 다른 사람들 중에도 나와 같은 의견을 가진 이들이 꽤 있을 것이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떠들던 8월의 늦장마가 올 거라던 예보는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첫 비가 내린 화요일 이후 일주일 동안 하루이틀을 제외하면 굵은 장마비가 쉴 새 없이 땅 위로 내리 꽂혔다. 물론 비가 오건 말건 센터의 일정은 그대로 실행되고, 아르바이트생이 할 일도 변하지 않았다. 오전 9시30분까지 일하러 나가고 오후 5시경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일주일 동안 해나와의 관계는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그걸 다행이라고 해야 될지는 모르겠다. 센터 입구에서의 그 사건이 있은 날 밤, 내 방 침대에서 얼마나 이불을 걷어찼는지 몰랐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고민하는지 정확한 실체가 없어서 더욱 답답하고 힘들었다. 해나가 나한테 실망한 것 같은데 정확히 왜 그러는지 감이 안 잡혔고, 내가 말실수를 한 것 같은데 막상 되새겨 보면 그렇게까지 못할 말을 뱉은 것도 아니었다. 거기다 그 다이어리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지도 점점 더 궁금해졌다. 그런 오만가지 잡념들이 뒤섞이는 가운데 애꿎은 이불만 내 발길질을 견디느라 고생이었다.


그런 과정을 지나 잠을 설쳐 졸린 눈으로 다음날 출근을 했을 때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최대한 태연한 모습을 보이자고 속으로 다짐도 몇 번씩 했다. 그렇게 평소보다 약간 늦게 출근한 해나를 마주쳤을 때, 그 애는 날 보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나도 큰 내색 없이 평범한 미소를 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언제 서로 얼굴 붉힌 사건이 있었다는 듯 우리는 다시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창고에서 물건을 옮겼다. 필요한 대로 배치했다. 그 과정에서 사소하고 엉뚱한 승부욕을 이따금 내비치는 해나도 그대로였다. 점심시간이 되면 같이 편의점에서 밥을 먹었다. 그 모든 일정이 끝나면 서로에게 내일 보자는 말을 하고 귀가한다. 당연하게도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 이어졌기 때문에 옥상에 올라가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다.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돌아오게 된 일상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 모든 일이 그렇게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도. 하지만 하루가 지날 때마다 어딘가 미묘하게 예전과 똑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차츰 고개를 들었다. 해나와 나는 분명히 겉으로는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보이지 않는 벽이 투명한 비눗방울처럼 우리 사이에 놓이게 됐다는 감각이 끊이질 않았다.


토요일이 되었다. 내일이면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세 번째 휴일을 맞는다. 달력을 보고 헤아리니 정확히 16일 후에 여기서의 업무가 모두 끝난다. 물론 내가 없어도 센터는 계속해서 운영되겠지만. 그리고 우리 사촌 누나가 여기서 여러 해 동안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했으니 어쩌면 나도 언젠가 다시 돌아와 같은 일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아무튼 그건 그거다. 이번 방학 내 첫 아르바이트는 16일 후에 끝난다.


그날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정을 보냈다. 슬슬 정오가 다가오자 민욱이가 생각났다. 정확히는 일주일 전 이 건물에서 우연히 민욱이를 마주친 일을 떠올렸다. 전화기를 꺼내 민욱이에게 기타 강의 끝났으면 좀 보자고 연락을 보냈다. 아이스크림 사준다는 말도 덧붙이니 얼른 가겠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편의점에서 민욱이와 만났다. 왜 굳이 연락까지 해서 불러냈는지는 나도 잘 몰랐다. 그냥 지금은 대충 옆에만 있어도 편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해나? 옆에 있으면 좋은 감정이 들지만 편한 사람은 아니지. 그 좋은 감정마저 요 며칠 간은 일정량의 불편함이 함유되었다. 또 민욱이는 뭐라고 할까…… 내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약속대로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주고, 나는 탄산음료를 한 캔 사서 편의점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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