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얼굴과 종잡을 수 없는 태도로 둘러싸인 수수께끼 상자 같다.
"민욱아, 내가 좀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서 그렇거든……."
"뭐가?"
나는 기껏 말해놓고도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다 입을 다물었다. 실은 저번에 해나와 있었던 사건에 대해 털어놓고 상담도 받고 싶었지만 그러자니 어디까지 털어놓아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더군다나 이 자식한테 상담해봤자 그리 쓸만한 대답을 얻진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뒤늦게 들고.
그런데도 부주의하게 첫머리를 꺼내 놓은 건 내 책임이었다. 그리고 민욱이는 뭔가 재밌는 말이 나올 것 같으면 알아낼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녀석이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늦었다.
"저번 주 일요일에, 애들이랑 다 같이 시내에서 영화 봤잖아."
"그랬지."
"그때 너도…… 해나 봤었지?"
민욱이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예쁜 애니까 아는 남자들도 많겠지. 거기 있던 남자 중 하나가 남자친구 아니냐? 우리 농구 자리 뺏은 놈들이었지?"
"야, 그런 거 아니야."
엉겁결에 내가 그런 소리를 툭 내뱉자 민욱이는 황당하다는 기색을 보였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걔한테 물어봤어?"
"물어본 건 아니지만……."
사실 여기부터가 진짜 내가 남의 말을 들어보고 싶어서 얘기하고 싶던 대목이었다. 목젖에 걸린 채 한동안 맴돌던 말이 약간의 긴장을 푼 것만으로도 바로 튀어나왔다.
"해나가 먼저 말했어. 남자친구 같은 것도 아니고, 그냥 어쩌다 같이 있게 된 거였다고."
"걔가 그런 말을 너한테 했다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민욱이는 진심으로 놀란 감정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입을 벌린 채 나를 봤다. 그 사실 자체가 좀 짜증나긴 했지만 넘어갔다.
"그럼 걔가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
"헛소리야. 걔가 나를 왜 좋아해."
일부러 가시 돋친 목소리를 냈다. 그 말을 들은 민욱이는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는데 더욱 짜증이 났다.
"그럼 그 말에 왜 그렇게 신경 쓰는데? 네가 좋아해?"
이번에는 반대로 아니라는 말이 바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얼마 전에 나 스스로 인정한 바 있는 감정이었지만 남한테 털어 놓으려니 당장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솟았다.
내가 한참 대답을 안 하자 민욱이의 표정이 점점 진지해지는 것이 보였다. 내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것이 분명했다.
"진짜 대박이네."
얼마 전에도 나와 해나를 엮으며 실컷 놀리던 민욱이는 오히려 놀라워하는 듯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내가 지금까지 여자에 크게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진짜 그러리라고는 여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저 농담거리였을 뿐.
그래서 나는 민욱이가 본격적으로 나를 지분대기 시작할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민욱이는 도리어 비교적 진지한 표정이 되어 내가 사준 아이스크림을 한 입 물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거 규진이한테는 말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원래 너한테만 말하려고 하긴 했는데…… 왜?"
보통은 누구보다 이런 일에 관심 가지길 좋아하고 말 옮기기도 잘하는 민욱이가 그렇게 나온 건 상당히 의외였다. 그리고 왜 하필 규진이의 이름이 나오는지도 궁금했다.
"걔가 요즘 너한테 좀 섭섭해하는 것 같거든."
"뭐?"
나는 미간을 좁혔다. 요즘 들어 내게 이런저런 고민들이 많았지만 거의 다 나 자신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갑자기 규진이 얘기가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고는 예상도 못 하고 있던 차였다. 규진이는 내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었고 정말로 스스럼없다고 생각해왔기에 더욱 그랬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민욱이도 뭔가 말하기가 난처한지 다소 쩔쩔매는 기색을 보였다. 말하는 걸 좋아하는 놈이 뭔가를 적당한 수위까지만 말하려니 여간 골치가 아픈 모양이었다. 이례적으로 조심스러운 어조로 민욱이가 말한 내용은 이랬다.
"사실 방학하고 나서부터 네가 제대로 얼굴도 안 비춘다고 좀 불만인 것 같았어. 대놓고 말한 건 아니긴 했지만."
"나는 일하느라 그랬던 거잖아. 저번주에는 같이 놀기도 했고. 그게 뭐가 문제라는 거야?"
"아니. 그게 문제라는 게 아니고."
민욱이가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지금쯤 아이스크림 하나에 낚여서 집에 안 간 걸 후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약간 기세를 수그렸다. 일단 들어는 보겠지만 어차피 시시한 일일 테니 너무 열 올리진 말아야지.
"이건 그냥 내 생각이니까 심각하게 생각하진 마. 내가 볼 때 규진이 걔는 이제 네가 우리랑 같이 다니기 싫어진 게 아니냐고 생각하는 것 같아. 그래서 네가 아르바이트한다는 말을 했을 때도 별로 좋게 안 봤던 것 같고."
일단 잠자코 듣기는 했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기가 차는 소리였다. 애초에 방학 동안 이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것도 어쩌다 우연히 벌어진 일이었다. 그것도 이제 고등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안됐으니 여유가 있을 때 경험 삼아 해보라고 부모님이 허락해준 거였다. 내가 내 친구들이랑 같이 다니길 싫어 한다니? 딱히 다른 친한 친구들이 있지도 않은데 말이다.
민욱이가 내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짐짓 태연하게 말했다.
"걔 원래 좀 찌질하잖아. 잠깐 그러다 말겠지. 그리고 또 하나…… 이건 진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지."
친한 친구의 표정 변화를 보며 속내가 어떤지 짐작하는 건 쉬운 일이다. 내가 볼 때 지금 민욱이는 입이 싼 본래의 자아와 어떻게든 선을 지켜야 된다는 의무감이 한창 충돌하고 있었다.
"넌 규진이랑 중3 때 친해졌던가?"
"맞아."
"그럼 잘 모를 수도 있겠네. 일주일 전에 우리한테 농구장 뺏은 놈들 있잖아."
"그놈들이 왜?"
"그 자식들 중에 한둘이 옛날에 규진이 좀 괴롭혔었어. 그렇다고 뭐 때리거나 아주 못살게 군 건 아니지만. 되게 만만하게 보고 바보 취급하면서 놀렸나봐."
그 말에 나는 잠시 뭐라고 말할지 몰라 미적대다 손에 든 음료수나 한 모금 마셨다. 민욱이가 이어서 입을 열었다.
"규진이 성격 알잖아? 자기가 있어서 만만하게 보이니까 그날 그런 일이 생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솔직히 그게 맞을 수도 있긴 하고. 탓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서 뭐? 그게 맞더라도 그게 규진이 잘못도 아니고. 잘못은 그놈들이 한 건데?"
갈수록 얘기가 이상하게 흐르는 것 같아서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이어서 민욱이의 얼굴을 조금 들여다보고 나니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아니 근데, 그 해나라는 애가 걔네들이랑 같이 있는 걸 너도 봤잖아."
나는 일부러 아무 말 안 하고 캔을 입술에 갖다 댔다. 조금 전에 이미 다 마셨다는 걸 깜빡했다.
그러니까 민욱이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거였다. 규진이는 여름방학이 시작하고 나서 내가 친구들과 자주 어울리지 않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든 뭘 하든 간에 말이다. 저번주 일요일에 만나서 같이 재밌게 놀았으니 그런 사소한 섭섭함쯤은 충분히 해소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재수 없는 자식들에게 농구장을 뺏긴 게 규진이의 소심함과 억하심정을 더욱 자극한 측면이 있었다.
거기서 그놈들과 함께 어울리는 해나와 내가 가까워지기라도 하면 규진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적어도 민욱이는 그리 좋은 일이 생기지는 않을 거라고 보고 내게 이런 말을 해주는 것이다.
나는 민욱이를 쳐다봤다.
"해나는 걔네들이랑 친구 아니라고 했다니까."
민욱이는 허둥대며 말을 주워섬겼다.
"그냥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나는 말없이 일어나 편의점 쓰레기통에 빈 캔을 버렸다. 민욱이가 먼저 편의점을 나갔고 내가 뒤를 따랐다. 어두운 하늘 아래 우산이 팡 펼쳐졌다.
시간차를 두고 편의점을 나온 코앞에 있는 센터 건물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어딘가 모든 일이 내 바람대로 돌아가지 않는 듯한 기분이다. 속이라도 후련해지고 싶어서 기껏 친구를 불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는데 갈비뼈 속에 생긴 매듭이 한층 더 꼬인 듯한 느낌 밖엔 안 들었다. 이 모든 감정들과 이상하게 꼬이는 상황의 중심에 해나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가면 갈수록 그 애가 누군지 점점 더 모르게 되고 있었다. 예쁜 얼굴과 종잡을 수 없는 태도로 둘러싸인 수수께끼 상자 같다.
다만 어차피 내가 그 수수께끼를 풀 날은 오지 않을 성싶다. 그러니 규진이와 엮인 그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게까지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해나를 좋아하게 됐다는 건 인정했지만 친구 이상 가까워질 거라고는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으니까. 난 찌질하게 매일 같은 일상만 쳇바퀴처럼 돌리고 있는데 걔는 늘 세상이 재미있는 걸로 가득하겠지.
불현듯 내가 없더라도 이 세상은 알아서 돌아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원래 내 위치라고 생각했던 장소가 있었다. 일상에서 아주 잠깐 벗어났을 뿐인데, 나 없는 모습은 상상도 안 갔던 친구들 사이에는 저절로 변화가 생겨났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이 건물이 지금까지 내가 살던 것과는 다른 세상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원래 있던 세상과는 합쳐질 수가 없었다. 결국 이 여름이 지나면 나는 제자리로 돌아갈 거고 다시 바깥으로 발을 내디딜 날은 안 올 것이다.
규진이는 내가 친구들이 있는 세상에서 한 발짝 걸어 나간다고 생각해서 내게 배신감을 느꼈던 걸까? 하지만 그건 쓸데없는 걱정에 불과했다. 어차피 난 그럴 수도 없을 테니까.
편의점에 있던 동안 잠시 주춤하는 듯했던 비가 보란듯이 건재함을 알리기라도 하듯 다시 콘크리트 두드리는 솜씨를 뽐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