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다음에 찾을 때 눈에 잘 띌 만한 위치에다 두었다.
다시 돌아온 일요일. 장마비는 지난 새벽까지 내 방 창문을 단말마처럼 두들기더니 아침이 되어서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렇지만 하늘에는 아직 조각나다 만 먹구름이 남아 날을 흐리게 만들었다. 태양이 이따금씩 구름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가 싶다가 도로 숨어들길 반복했다.
지난주와 달리 오늘은 친구들과 약속 같은 건 잡지 않았다. 단체 메시지를 통해 이야기는 오갔는데 아무래도 주말까지 비가 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며 실행까지는 가지 않았다. 막상 날이 밝자 비가 그치기는 했다. 그래도 오전 내내 차고 축축한 바람에 느릿느릿 떠가는 먹구름을 보고 있자면 손끝으로 툭 건들기만 해도 부르르 떨며 비를 뿌릴 듯했으므로 이제 와서 결정을 번복하고 외출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나도 그 편이 좋았다. 나 역시 친구들을 만나 공놀이나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보는 것도 좋아했지만 종종 가만히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가 많았다. 친구들을 만나길 좋아하는 것도 내 작은 세상을 공유하고 이해 받기 쉬운 무리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사람은 비슷한 부류끼리 어울리게 되는 법이니까.
다만 그러면서도 한 번씩은 정말 혼자만 남고 싶어질 때도 간혹 있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나만의 그 비밀 해변이었다. 거기 혼자 우두커니 앉아 혼자 있으면 가끔은 진짜로 지구에 혼자 남은 인간이 된 기분까지 들 때가 있었다. 그런 기분은 소름 끼치는 면도 있었으나 한편으론 꿈을 꾸듯 농밀하여 깨고 싶지 않게 만들기도 했다.
다가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다시 다가오고.
파도는 마치 마음 같다. 멀리서 보면 그저 짙푸른 도화지에 잔잔히 퍼지는 선에 불과하지만 막상 가까이 다가가 보면 끊임없이 요동치고 부서지다 다시 쌓아 올려지는 분주한 작업의 반복이었다. 우습게 보고 한 발짝 내디디면 부지불식간에 신발을 적시는 변화무쌍한 것이었다. 고요한 것 같아도 쉬지 않고 흔들리는 내 마음 같다.
그날 내내 날은 개지 않았어도 다시 비가 내리지는 않았다. 나는 집에 붙어서 아빠의 일 때문에 널려 있는 잡지를 뒤적이며 시간을 보냈다. 커피나 와인 잡지 같은 건 읽어봐도 잘 와닿지 않고 내용도 머리에 잘 안 남았다. 나온 지 좀 오래된 잡지에서 자동차 사진을 좀 구경하다가 익숙한 표지를 가진 잡지의 지난달호를 집어 들었다. 다가오는 여름 휴가철을 맞아 우리 도시의 즐길 거리들을 이것저것 소개하는 특집호였다. 평생 살아온 곳이니 별달리 새롭게 알게 될 건 없을 거라, 자못 시시하게 여기며 책장을 넘겨봤다.
그 잡지는 며칠 머물다 갈 외부인을 대상으로 볼거리, 먹을거리를 설명하고 방문할 순서까지 체계적으로 정리해 놨기 때문에 실제로 관광객들에게 제법 도움이 될 듯했다. 그리고 의외였지만 나도 잘 몰랐던 장소들이 많았다. 물론 내 고향은 면적이 작다고는 해도 엄연히 도시인지라 그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그 순간에는 내가 나고 자란 곳을 여태 이렇게 몰랐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과 학교, 가끔씩 시내만 들락거리던 내 생활 반경이 단조롭다는 게 새삼 실감됐다.
몇 페이지 더 후루룩 넘기니 웬 공연 소개 페이지가 나왔다. 해수욕장 근처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번화가의 작은 실내 공연장을 빌려 몇 주간 진행될 소규모 음악 페스티벌이라고 했다. 첫 공연은 8월 중순부터 시작이지만 한 주에 한 번씩 개최해 9월 초중순까지 계속될 예정이었다. 페이지 구석을 대강 훑어보니 이름도 생소한 인디 밴드 등이 출연 목록에 올라와 있었다. 그런대로 재미있어 보이긴 했지만 유명한 사람도 안 오고, 어딘가 전위적인 분위기 같기도 해서 적당히 훑어보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려 했다.
그런데 공연 설명을 몇 줄 읽고 보니 어디서 이런 것에 대해 본 적이 있는 듯한 기시감이 생겼다. 어디서 이런 걸 본 적 있는 것 같았는데, 인터넷 광고에서였을까…….
얼마간 더 잡지를 들여다보았다. 얼마 전 저녁에 아빠와 나눴던 대화가 어렴풋이 기억났다. 무척 평범한 날이었고 아빠랑도 몇 마디만 간단히 주고 받았을 뿐더러 그 내용까지 전혀 특별하지 않았기에 잊고 있었다.
그때 그걸 어디다 뒀더라? 잠깐 기억을 더듬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책상 서랍을 뒤적거렸다. 역시나 별생각 없이 받아서 아무데나 던져 놓았던 터라 얼른 나타나진 않았다. 어디 이상한 구석에 처박아 두고 잊은 게 아닌가 싶을 즈음에 서랍 한쪽에서 티켓 두 장이 잡혀 나왔다. 이걸 받은 게 며칠 전이었지? 아르바이트 끝나고 집에 오다가 사촌 누나를 만난 저녁이었다. 그날 거실에서 나와 짧게 얘기하던 아빠가 공짜로 받아왔다며 건네준 티켓.
그걸 들고 다시 잡지 앞으로 돌아와 보니 과연 그 공연의 티켓이었다. 처음부터 아빠가 취재처에서 홍보차 나눠준 걸 가져왔다고 했으니 그렇게 놀랍거나 새삼스러울 것까진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잡지 기사를 보던 내 흥미를 비교적 크게 만들기는 했다. 기왕 공짜로 표까지 생겼으니 한 번쯤 가 볼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잡지에 적힌 공연 날짜를 보며 머릿속으로 진짜 가게 될 계획을 그려보자 그리 와닿지 않게 되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민욱, 세찬, 규진 세 명이었다. 걔네들이 이런 공연에 딱히 흥미를 가질 것 같진 않았다. 물론 평소엔 관심이 없더라도 한 번쯤 특이한 경험을 하는 거니 가보겠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건 표가 두 장이었다. 우린 네 명이니 선뜻 가자고 하기가 좀 그랬다. 거기다 요전에 민욱이가 전해준 규진이 이야기까지 떠오르자 마음 한구석이 살짝 찜찜해지기까지 했다. 그깟 걸로 우리 사이가 멀어질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이럴 때 한 명만 골라서 가기도 어딘가 꺼려진다.
아니면 누나랑 같이 갈까?
그것도 나쁘지 않다만 실은 마음 깊은 곳에서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 따로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이내 해나의 얼굴이 눈앞에 선해지자 누구한테 들킨 것도 아닌데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물론 해나랑 둘이서 이런 곳에 가게 된다면 진짜로 재미있을 것이다. 아직 개학하기까진 2주나 남았으니 마음만 먹으면 권할 기회도 충분히 많았다. 그렇지만 내가 권한들 그 애가 받아줄까? 그럴 가능성은 낮았고 그렇게 되면 그 다음날부터 해나 얼굴만 봐도 어딘가로 숨고 싶어질 것이다.
아니, 그런 걸 다 떠나서 난 그 애와의 관계에 쓸데없는 욕심 같은 건 부리지 말자고 이미 결정하지 않았는가. 이런 고민 자체가 본래부터 어불성설이었다.
한숨을 쉬고 읽던 잡지를 덮었다. 티켓을 들고 도로 내 책상으로 돌아와 서랍에 넣었다. 다만 이번에는 다음에 찾을 때 눈에 잘 띌 만한 위치에다 두었다.
"무슨 생각해?"
"뭐?"
해나의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뒤이어 살짝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까지 갑작스럽게 내 시야로 들어오자 나는 놀라 움찔했다. 해나는 뭘 그런 걸로 놀라냐며 웃는다. 쫄보 같다는 짓궂은 농담과 함께.
위치는 문화 센터 건물 옥상. 날짜는 수요일. 때는 점심시간. 일주일 내내 쏟아붓던 비가 그치게 되자 나와 해나는 다시 파라솔을 펼쳐 놓은 옥상에 올라와 간단한 한 끼를 때울 수 있게 됐다.
어떻게 보면 잘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싶었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가 냉전에 돌입하는 것도 이상했다. 따로 싸움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미묘한 불편함이 있었던 대화를 몇 마디 나눈 게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일말의 찜찜함이 마음 속에 남았을 수는 있어도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렇게 되었다. 둘 사이에 아주 작은 균열이 있었어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남들이 볼 때는 정말로 장마 전이나 후나 아무런 차이를 모를 테지만 마음속에는 그 실핏줄 같은 균열이 여전히 존재했다. 해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놀란 건 딴 생각을 하다 갑자기 해나가 불쑥 짓쳐들어온 탓이었으나 한편으로는 그전까지 혼자서 하고 있던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해나가 내 머릿속을 꿰뚫어 본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물론 그럴 리는 없었고 나도 모르게 옥상 풍경을 바라보며 멍한 얼굴로 있었던 게 진짜 이유였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한참 그런 표정을 하고 있으면 누구든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물어볼 것이다.
"그냥 경치 좀 봤어."
"매일 올라오는 옥상인데 무슨 경치를 볼 게 있다고?"
"그래도 볼 때마다 달라지는 풍경이란 게 있단 말이야."
내뱉고 보니 어쩐지 낭만적인 소리가 된 것 같았다. 나는 해나가 내 그런 말을 듣고 웃을 줄 알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웃음을 짓긴 했지만 내 생각대로 장난기 있는 웃음이 아니라, 의뭉스럽게 입가에 살풋 얹혀진 미소였다.
"그거 꽤 멋있는 말이다."
의외의 반응에 나는 괜히 열없어서 대답했다.
"멋있기는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