끽해야 몇 단어 적는 듯하다 다시금 원래 상태로 돌아가 잠잠해진다.
어쨌든 몰래 머릿속에 굴리고 있던 상상을 들키지는 않았다. 쑥스럽지만 이런 타이밍에 그 문제의 티켓 두 장을 내밀며 같이 공연을 보러 가자고 하면 어떻게 될지 계속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보 같지. 이제부턴 한 발 물러선 관계라고 혼자서 그렇게 뇌까렸으면서도 뭔가 기회 같아 보이는 순간이 오면 자연스럽게 이런 식으로 생각이 움직인다는 게. 심지어 지금 내 주머니에는 그 티켓도 없었다. 그건 여전히 내 서랍 속에 있다.
"다 먹었으면 내려가자."
먹은 것들을 정리하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쓰레기통에 처리했다. 이제부터는 오후 일정.
내 착각인지는 몰라도 해나는 며칠 전부터 예의 그 검은 다이어리를 자주 손에 들고 있었다. 강의실 뒤편에서 같이 대기하고 있는 지금도 다이어리를 펼쳐 무릎에 놓은 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아까 옥상에서는 나더러 멍하게 있다고 뭐라고 한 주제에 지금 해나도 만만찮게 흐리멍덩한 눈을 내리깔고 있는 중이다. 그러더니 퍼뜩 뭔가가 떠오른 듯 펜을 들어 다이어리에 뭔가를 끼적인다. 그런데 그리 길게 쓰는 것도 아니고 끽해야 몇 단어 적는 듯하다 다시금 원래 상태로 돌아가 잠잠해진다.
한참을 그렇게 홀린 듯한 행동을 반복하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드는 해나. 왠지 예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던 기분이 들었다. 나는 살짝 멋쩍긴 했지만 눈을 돌리지 않고 해나의 시선을 맞받았다. 해나는 왠지 날 보고는 입술을 비죽거리다가 미묘하게 표독스런 눈이 되어선 내게 혀를 쏙 내밀어 보였다. 그리고 다이어리를 덮고 가방 속에 집어넣어버렸다.
그 일에 대한 생각이나 말을 하기도 전에 강의실 앞쪽에서 도우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네"하고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 나갔다.
그날 퇴근하고 나서는 친구들과 만났다.
일을 하면서 틈틈이 친구들과 연락을 나누다 보니 우리집 근처에서 오후쯤에 만나 또 농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집에 가는 길에 자연스럽게 합류도 할 수 있고 하니 나도 흔쾌히 늦게라도 가겠다 대답했다. 애시당초 농구란 게 팀을 둘로 나눠야 뭘 제대로 할 수 있는 운동이니까 내가 없는 동안엔 셋이서 링에 공이나 던져 넣으며 놀고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방학 중엔 내가 없어서 제대로 된 게임을 별로 못 했을 거란 소리도 됐다.
내가 도착하자 가로등 밑에서 공을 던지던 친구들이 손을 흔들며 장난스럽게 환호했다.
"오, 왔냐?"
"빨리 빨리 좀 다녀라!"
나한테 날아오는 공을 붙잡고 얼른 손을 들어 링을 향해 슛을 한 번 쐈다. 깔끔하게 골인하는 모습을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다만 원래 우리가 자주 이용하던 농구장은 여기가 아니었다. 저번에 나쁜 놈들에게 자리를 빼앗기는 불상사를 당한 곳은 해변가에 있는 넓고 깔끔한 코트였다. 지금 여기도 그럭저럭 괜찮고 나로서는 무엇보다 집에서 가까워서 편하지만, 왜 굳이 늘 가던 곳이 아니라 여기로 오게 됐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당장은 내가 골을 넣자마자 자연스럽게 게임이 시작됐기에 그걸 가지고 가타부타할 겨를이 없었다. 이번에는 느닷없이 나타난 불량배 같은 녀석들에게 자리를 뺏기는 재수 없는 일도 없이 두어 시간 동안 즐겁게 운동했다. 오전부터 일을 하다 막 끝나서 돌아오고 있던 시점이었는데도 그리 피로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처음 느꼈던 농구장 의혹은 금세 잊혀버렸다. 이후 할 만큼 하고 가로등 불빛이 들어온 농구장 바닥에 앉아 땀을 식힐 때가 되어서야 그게 다시 떠올라, 나는 그 화제를 무심코 입에 올리게 되었다.
"근데 너희들 왜 여기로 온 거야?"
"너는 여기가 집에서 가까우니까 좋잖아."
"나야 좋긴 한데. 원래 우리가 만나던 코트 있잖아. 거긴 다른 사람들이 쓰고 있었어?"
따지고 보면 우리한테 좋은 코트였던 만큼 다른 사람들한테도 좋을 테니 거기가 인기가 많다고 해도 안 이상했다. 한데 좀 이상했다. 내가 별말을 한 것도 아닌데 규진이는 불만스럽다는 듯 얼굴이 구겨지고 세찬이도 미묘하게 규진이의 눈치를 보는 듯한 기색이 되었다.
그렇게 되자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 있어?"
그쯤 되자 내 딴에는 어딘가 경직된 듯한 분위기를 풀어 보겠다고 이렇게 말하게 됐다.
"또 딴 사람한테 뺏기기라도 했어?"
나름대로는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한 거였는데 정작 돌아오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나는 당혹스러운 기색을 속으로 감추며 친구 셋의 얼굴을 한 번씩 돌아보았다.
"뭐야? 진짜로?"
"아, 아니. 뺏긴 건 아닌데……."
그러자 민욱이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내 쪽으로 한 발짝 나서며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가 가니까 그때 걔네들이 이미 거기서 하고 있더라. 굳이 거기 있어도 좋을 건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여기로 왔어."
사정을 들어봤다. 내가 아르바이트로 바쁜 동안 그 녀석들과 마주쳤던 일이 몇 번 더 일어났다고 했다. 한두 번 충돌할 뻔하기도 했는데 진짜로 그랬다가 손해를 볼 쪽이 어디인지는 뻔했다. 그 결과 아예 해변가 코트는 포기하고 이쪽 농구장으로 장소를 옮기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당연히 농구장이야 먼저 나와서 차지한 사람들이 쓰는 게 맞았다. 다만 그렇게 생각해도 저번에 엄연히 먼저 도착했던 우리를 쫓아낸 건 그 나쁜 놈들이 아닌가? 지금 우리는 충돌을 꺼려 쫓겨난 모양새였다. 친구들이 왜 그랬는지는 이해가 가지만, 정작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결과가 별로 달라지진 않을 거라 생각하긴 하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결코 유쾌할 수 없는 소식이었다.
"뭐 그런 놈들이 다 있어? 우리가 만만한가?"
나는 그렇게 투덜댔다. 나도 그런대로 당시의 상황이 눈앞에 그려졌기 때문에 굳이 누구 탓을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말하자면 푸념에 가까웠다. 솔직히 우리가 만만한 것도 맞았고 말이다.
그런데 그때 나는 민욱이가 저번에 전해줬던 규진이와 관련된 뒷사정을 잠시 잊고 말았다. 기억하고 있었다고 해도 그 말이 문제가 될 거라고 여기진 않았을 것이다.
"야, 그만해."
그래서 규진이가 꽤 불쾌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을 때 난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규진이는 저번에 쫓겨난 건 물론이고 이렇게 완전히 밀려나게 된 것까지 다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부분적으로는 사실일 수도 있어도 진짜로 나쁜 건 그 양아치들이니 규진이 잘못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좀 경솔했다고 인정하고 한 발 물러서려는 때였다. 별안간 규진이가 쏘가리처럼 팩 쏘아붙였다.
"윤승연. 너는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으면서 뭐가 그렇게 불평불만이 많아?"
그 말을 들은 나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살짝 멍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저렇게 과민반응할 줄은 몰랐어도 규진이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는 얼추 이해가 갔으므로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규진아. 난 지금 너 때문이라고 하는 건 아니야."
"나 때문?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또다시 아차 싶었다. 그 나쁜 놈들이 과거 규진이를 괴롭힌 적이 있다는 건 민욱이가 내게 살짝 귀띔해준 거였다. 규진이 입장에선 내가 그 속사정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쁜 일일 것이다. 곁눈질로 보니 민욱이도 긴장한 눈빛이었다. 나는 일단 말을 돌리려 했다.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뭐냐면……."
"네가 있었으면 이렇게 안됐을 거라고?"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너 왜 그래?"
"알바한다더니 여자애만 따라다니고. 우리랑은 잘 만나지도 않더니 되게 건방져졌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소리까지 하는 걸 들으니 나도 부아가 치밀 수밖에 없었다.
"야! 그거랑은 상관없잖아!"
한 발 물러나려다 예상치 못한 소리를 듣고 씩씩대기 시작한 나를 보고 남은 둘, 민욱이와 세찬이의 태도도 변했다. 내가 한 마디 더 하려는데 세찬이가 얼른 나와 규진이의 사이를 가로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