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제트기가 흩뿌린 비행운이 하늘에 남아 있었다.
아르바이트가 종료될 날까지 10일. 이젠 불과 2주도 안 남은 시점이었다. 아마도 인생에 단 한 번뿐인 고등학교 1학년의 여름방학은 평생 잊지 못하게 될 성싶었다.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그리 넓지도 다채롭지도 않았던 내 생활이 거짓말처럼 넘실대게 됐으니까. 파도처럼. 그래, 파도처럼.
지난 일요일 이후로 친구들과는 크게 이렇다할 사건이 없었다. 연락은 몇 번 오갔다. 개인적으로 한 번씩은 전화도 했다. 오간 대화는 대체로 별것 없었다. 누가 잘못했지만 누구도 거기서 그렇게 말했던 건 좀 그랬다, 별로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아무튼 일 잘해라.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흐름이었고 실제로도 별다른 잡음 없이 흘러갔다. 이런 건 화해보다는 봉합이라고 부르는 게 옳을 것이다. 한동안은 다소 어색해진다거나 하는 후유증이 남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르면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아마도.
진짜로 대하기 힘들어진 것은 해나였다. 처음 만났던 날은 어떻게 그렇게 쉽게 대할 수 있었는지 이제 와선 불가사의할 지경이었다. 거리를 두고 나와 해나의 차이를 받아들이기로 한 지가 벌써 2주나 지났는데도 어쩌다 웃는 모습만 봐도 마음이 동하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포기하겠다는 생각을 한 날로부터 하루마다 점점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눈앞에 있는 초콜릿 케이크를 먹지 않겠다고 결심한 꼬맹이와 같은 형국일까.
"야, 윤승연."
같이 의자를 정리하던 중 해나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대화를 걸어왔다. 지난 3주 동안 해나는 내가 많이 편해졌는지 이젠 정말 스스럼없는 목소리로 부르게 되었다. 처음 만난 날 가느다란 목소리와 숨죽이는 웃음소리로 포장된 내숭은 보이지 않았다. 쟤는 남의 속도 모르고.
그리고 나는 내 속을 모르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매우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왜?"
"넌 월급 타면 뭐할 거야?"
"월급?"
"우리 이제 다다음주면 돈 받잖아. 신경 안 쓰고 있었어? 난 돈 탈 생각만 하면 하루종일 신나는데."
나는 애매하게 관자놀이 근처를 긁었다. 아마 전에도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어디다 써야 될지 잘 모르겠더라."
"뭐? 그럼 넌 알바를 왜 했던 거야?"
해나는 정말 외계인이라도 보는 듯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내 말이 그렇게 이상한 건가? 난 그저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이었다.
"저축이나 할까?"
"진짜로? 너 되게 독특하네."
악의 없이 한 말이었겠지만 나는 왠지 머쓱해졌다. 독특하다. 좋아하는 애 입에서 듣기에 별로 기분 좋은 표현은 아니었다.
"그럼 너는 어디다가 돈 쓸 계획인데?"
그러고 보니 그것도 언젠가 한 번 물어본 적이 있는 질문 같았다. 그리고 역시 들어봤던 듯한 답변이 나왔다. 해나는 과연 자기 말 대로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 생글대며 말했다.
"난 옷이나 사려고. 이번 달 지나면 슬슬 가을이잖아. 미리 겨울 옷도 사 둬야지."
"옷을 100만원 넘게 사?"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인지라 나는 거의 경외롭기까지 한 기분으로 해나를 봤다. 그러자 해나도 조금은 난처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렇게까지 하진 않을 거야. 좀 사고 남겨 두거나…… 아니면 전부터 사고 싶었던 게임기를 사는 것도 괜찮겠다."
마지막 말은 즉흥적으로 떠올랐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건 고사하더라도 나는 그 말의 내용에 더 관심이 끌렸다.
"너 게임도 해?"
"왜? 하면 안 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당연히 안 되리란 법은 없었다. 그래도 여태껏 해나를 겪어오면서 그런 것에는 그리 흥미가 없을 거란 인상을 받아왔다. 집에서 게임을 할 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외출을 하고 싶어할 것 같은, 그런 인상.
"나 게임 좋아해. 어릴 때 부모님이 선물로 사주신 게임기를 얼마나 많이 가지고 놀았는데. 그런데 저번 명절에 친척 동생 하나가 새로 나온 게임기 들고 와서 자랑하는데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
그런 면도 있었구나. 하긴 사람이 꼭 한 가지 성향만 가지고 살 필요는 없다. 실질적으로 친근하게 얘기를 나누는 사이가 된 지가 얼마나 됐다고 내가 해나를 속속들이 알고 있겠는가.
의자를 모두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나는 일하던 허리를 펴고 강의실 창문 바깥을 내다보았다. 날짜는 벌써 8월 중순을 넘어가고 있었다. 눈치 채지도 못한 동안 햇빛은 노랗게 익었고, 그림자는 길어졌다. 처음 방학을 시작했을 때는 한 달도 무척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이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벌새처럼 날아갔다. 꽤나 다사다난한 여름방학이기에 그랬는지도 몰랐다. 세상이 끝장나는 엄청난 사건들이 벌어진 것은 아니더라도, 내겐 단 몇 주 만에 충분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지난 시간만큼이나 다가오는 시간도 빠르게 흘러갔다. 해나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 달력을 확인했던 날이 8월 11일이었다. 친구들과의 불미스러웠던 사건을 유야무야 모르는 체 묻고 만났던 게 13일. 아무리 바닷가에 살아서 특별할 것도 없다지만 그래도 여름방학 가기 전에 수영이나 실컷 해보자고 해수욕장에서 온종일 놀았다. 다음날 푹 익어버린 채 헤롱대는 상태로 출근하니 해나가 어제 대체 뭘 하고 온 거냐고 물어봤던 게 14일.
그로부터 남은 일주일은 말 그대로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듯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지막 수업이 끝난 날 강의실에 해나와 둘이 남게 되었다. 21일.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당연히 이 건물이 내일부터 어딘가로 사라지는 건 아니니 이 강의실의 용도가 이걸로 끝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여름 특강 일정이 오늘로 끝나 새로운 커리큘럼이 진행되긴 하겠지만 그것 또한 매년 있었던 일이다. 그저 우리 둘이 여기에서 없어질 따름이었다.
"아, 두 분 오늘이 마지막 날이죠? 한 달 동안 수고 많으셨네요. 사람도 한 명 줄었는데 일 진짜 잘해줬어요."
"아니에요. 시키는 대로만 한 건데요 뭘."
솔직히 해나는 몰라도 나는 이래저래 서툰 면이 많았던 것 같은데. 매니저 형은 마지막까지 서글서글하고 친절했다.
"올겨울이나 내년에 또 괜찮으면 일하러 와요."
"그러면 좋긴 하겠네요. 근데 그때쯤엔 공부하고 있어야 돼서 어떻게 될지……"
"맞다. 둘 다 고1이랬죠? 내년부턴 공부 열심히 해야 겠네."
그건 맞는 말이었다. 부모님이 이번 여름에 아르바이트를 허락해 준 것도 비교적 여유로운 1학년이라 그랬을 것이다. 해나네 집안은 어떤 분위기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해나는 정말로 내년에 여기 다시 오게 될지도 모르지. 내가 있든 없든지 간에.
해나는 계속해서 발랄하게 종알거렸다.
"그런데 옥상에 둔 파라솔까지 치우고 갈까요? 우리가 갖다 놓은 건데 이제 우린 없잖아요."
"아참, 그걸 둘이 해 놨던 거였지. 뭐, 굳이 안 치워도 될 것 같아요. 다른 직원들 중에도 거기에 그렇게 두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이제 날씨 선선해지면 둘처럼 거기 올라가서 쉬는 사람이 좀 있을 것도 같고."
그러자 해나가 내 팔을 툭 치면서 말했다.
"들었어? 그렇대."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대화의 흐름상 우리가 매니저 형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 직후 그 파라솔 아래로 들어오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다만 의자에 앉아 수다를 떨거나 하지는 않았고 그냥 주위만 알짱거렸다.
해나가 파라솔의 기둥을 손으로 툭 치며 말했다.
"이젠 이거하고도 안녕이네."
"그러게."
"네가 처음 이 파라솔 여기로 들고 왔을 때 얼마나 웃겼는 줄 알아?"
나는 진심으로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그랬다. 해나가 여기다 비밀장소 같은 걸 만들고 싶다고 하자마자 바로 다음날 내가 이걸 여기다 올려다 놨었다. 돌이켜보면 그땐 정말이지 뭔가에 홀렸던 모양이다. 지금이었다면 그런 짓을 못했다. 못한다고.
"그래놓고 여기 제일 좋아했던 건 너잖아."
"그건 맞지. 비밀장소치고 많이 탁 트인 곳이긴 하지만."
해나가 조금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얼굴이 됐다. 한 번 더 손을 뻗어 파라솔 기둥을 쓸어보더니 이어서 말했다.
"나는 좋았어."
그러고는 미소를 거두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나를 본다. 나도 웃었지만 시선을 똑바로 쳐다보진 않고 약간 멀리 던졌다. 어느 제트기가 흩뿌린 비행운이 하늘에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