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때문이야.
"너무 그러지 마. 솔직히 규진이 말도 그렇게 틀린 건 아니잖아."
"무슨 말? 내가 일부러 너희 피한 거야? 난 일하느라 그랬던 거잖아!"
"그래도 네가 직접 본 것도 아니면서 자꾸 뭐라고 하니까 규진이가 저러지."
날 막으면서 규진이를 두둔하는 세찬이의 모습에 난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애초에 내가 그 일에 그렇게까지 책임을 물며 들먹인 것도 아니었다. 불만은 좀 있었지만 그저 한두 마디 푸념했을 뿐인데 그걸 이렇게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행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내가 그렇게 당혹감에 머뭇거리고 있자 규진이는 세찬이의 어깨 너머로 날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일은 누가 시켜서 하는데? 안 하면 죽는 것도 아닌 걸 가지고 또 유세야?"
그때쯤 나는 규진이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소릴 하는 건지 이해했다. 내가 지난 며칠 동안 두려워했던 것. 방학 동안 지금까지 해보지 못한 경험을 연달아 하고서 내가 안주하고 있던 위치보다 더 넓은 세상이 있다고 절감했던 것 말이다.
규진이는 나보다 먼저 그런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자기들을 두고 먼저 넘어갈 까봐 불안해하고 있는 거였다. 질투라고 표현할 수도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오해에 화가 났다. 안 그래도 나는 원래 있던 여기가 내가 있을 위치라고 결론 내린 상태였다. 그렇기에 규진이에게 제대로 설명할 이유가 있었다. 네가 걱정할 일은 안 일어날 거라고.
"야 김규진. 자꾸 뭐 때문에 오해하는 지는 모르겠는데, 이거 그냥 방학 한 달만 하는 단기 알바야. 그것도 우리 사촌 누나가 경험이나 해보라고 소개해준 거고. 그리고 내가 이해나랑 진짜 뭐가 있는 줄 아나 본데, 그것도 아니야. 걔는 나 같은 건 관심도 없어."
그 말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왔을 때는 얄궂게도 나도 심장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금껏 속으로는 몇 번씩 되뇌어 왔던 것이긴 하지만 이렇게 소리 내어, 그것도 친구들 다 듣는 데서 말하게 될 줄은 몰랐다. 생각이 소리를 가지자 일종의 선고가 되는 듯했다. 규진이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았다. 걔는 나 같은 건 관심도 없어.
"그냥…… 아는 사이야."
나는 그렇게 말을 맺었다.
내 목소리에서 뭔가 전해졌는지 친구 세 명은 한동안 말이 없어졌다. 시선을 돌리며 딴전을 피우거나,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차거나. 규진이마저 한풀 가라앉은 기색이었다. 다만 불만스러운 눈빛만은 여전했다. 아직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남은 것 같은 듯도 하다. 내가 그렇게 느낄 무렵 과연 규진이는 다시 입을 열었고, 나는 한 번 더 놀랐다.
"이해나? 그 여자애가 그날 그 양아치들이랑 같이 놀고 있었다며."
그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헤 벌렸다. 우리 농구장 뺏은 녀석들이랑 해나가 어울리고 있었다는 건 나한테도 꽤 충격을 줬던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걸 아는 게 나랑 민욱이 둘뿐인 줄로만 알았다. 물론 민욱이가 직접적으로 나한테 그렇다고 확언한 적은 없어도 이 자식이 의리가 있다면 그럴 줄 알았는데…….
고개를 쳐들자 민욱이도 적잖이 당혹스러운 모양새였다. 나는 또 언성을 높이려다 그냥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지금 상황을 한 번 돌아보니 이렇게 복잡하고 어지러울 수가 없었다. 민욱이는 그때 우리에게서 농구장을 뺏은 무리가 옛날에 규진이를 괴롭힌 적이 있다고 했다. 지금 규진이가 일견 저렇게 이해가 잘 안 가는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근데 내가 그 사연을 안다는 걸 규진이는 또 모른다.
이렇게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될지 감도 안 잡히는 가운데, 나는 그냥 완전히 해소하기를 포기해버렸다. 그래서 제일 단순한 답변만 내밀었다.
"안 그래도 해나가 말하더라. 걔넨 자기 친구 아니고 어쩌다 우연히 같이 있었대."
"그걸 믿어?"
"못 믿을 건 또 뭐야? 아니, 애초에 아니면 뭐 어때서. 걔랑 나랑 아무것도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한 것 같은데?"
아까만 해도 조금도 없는 듯했던 피로가 한순간에 몰려왔다. 오늘 용을 쓰는 건 여기까지 하고 싶었다. 내일 또 일어나서 일하러 나가야 되는데, 더 이상 기운을 빼고 싶지도 않았다.
시선을 내리니 내 손에 농구공이 있는 게 보였다. 방금 전까지는 거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을 정도였다. 나는 집에 돌아갈 요량으로 딱딱한 농구장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무나 잡으라는 의미로 농구공을 바닥에 그대로 내던졌다.
텅. 우리 말소리가 사라지니 거짓말처럼 고요해진 농구장에 공 튕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 참 아이러니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청명한 소리였다. 그리고 아무도 연달아 튀어 오르는 농구공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몸을 돌렸다.
"난 간다."
나는 그 말을 남기고 집 방향으로 걸어갔다. 여기 남아 있은들 더 할 말도 없고 괜히 상황만 점점 이상하게 꼬일 것 같았다. 친구들도 나랑 같은 생각이었는지 등 뒤에서 따로 잡으려는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가 우리집이랑 가깝다는 게 다행이었다. 얼른 집에 들어가 씻고 쉬고 싶었다.
친구들이랑 만나 농구하고 들어가겠다고 이미 집에 연락을 해뒀기 때문에, 엄마는 내가 집에 늦게 들어왔다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내 표정을 보자 대번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봤다. 내 딴에는 표정 관리를 하겠다고 했는데 엄마한테는 안 통하는 모양이었다. 우물거리며 아무 일도 없었다고 둘러대고 서둘러 목욕을 하러 들어갔다.
샤워기 물 아래 오래 서 있었다. 물을 끼얹으면 열이 좀 가라앉을 것 같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마저 몸을 씻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나오자 이미 밤이었다. 약간은 이른 감이 있었지만 그대로 취침하기 위해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런 시도가 무색하게 그날은 잠이 영 오지 않는 밤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 규진이와 했던 언쟁을 되새기다가 뜬금없이 거기서 더 거슬러 올라가 해나와 나눴던 얘기를 떠올리기도 하고, 내일 일정에 대한 걱정을 하기도 했다. 머릿속이 일관성이라곤 전혀 없이 엉망진창으로 엉켜버렸다. 인간이란 침대에 누워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존재인가보다.
나는 친구들과 이렇게 싸우게 될 날이 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다른 게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복잡한 녀석들이라는 생각 자체를 안 해서였다. 만나서 시시껄렁한 장난이나 주고받고, 웃기면 웃고, 배고프면 먹고. 그걸 다 같이 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는 일상이었는데. 이렇게 어디부터 잘못된 건지 모를 정도로 배배 꼬인 갈등을 겪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인가. 농구장에서 등을 돌릴 때까지만 해도 막연하게 내일이면 이런 건 대수롭잖게 잊히고 다 원래대로 돌아갈 거라고 여기긴 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 이렇게 하루를 돌아보고 있는 지금은 의문이 들었다. 정말 새롭게 날이 밝으면 아무렇지 않게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주고받고, 다시 만나 운동하고, 영화도 보게 될까.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지금까지의 우리와는 달라질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직감 역시 들었다.
이해나.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이불 속에서 소리 내어 뇌까렸다. 해나는 내가 지금 자길 떠올리며 이런 말을 하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하고 있을 것이다. 솔직히 나도 왜 밑도 끝도 없이 상관도 없는 해나를 입에 올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 더 말했다. 너 때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