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라도 없었다면 완벽한 고요였을 텐데.
이젠 드디어 갈 때라고 생각해서 옥상을 내려가는 계단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해나가 몇 걸음 거리를 둔 채 따라오며 불쑥 나를 불렀다.
"그런데 있잖아."
"응?"
"이건 안 궁금했어?"
뒤를 돌아보니 해나가 익숙한 검은 다이어리를 손에 쥐고 날 보고 있다. 나는 그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눈을 깜빡였다. 궁금하다니? 다이어리가?
몇 초 지나지도 않았다.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해나는 혼자 고개를 젓더니 나를 지나쳐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내 옆을 스칠 때 이런 소리가 들린 듯도 했다.
"아니야. 그냥 잊어버려."
나는 잠깐 그 자리에서 주춤대긴 했지만 금방 먼저 걷는 해나의 뒤를 따랐다.
센터를 빠져나온 우리는 첫날에 그랬던 것처럼 가로등 늘어선 도로를 나란히 걸어 돌아갔다. 저 멀리서 철썩철썩 파도치는 소리가 여기까지 전해져 온다. 희미하게 끼룩대는 갈매기 소리에, 왁자지껄 떠드는 해수욕장 방문객들의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이제 슬슬 여름도 끝물에 들어서는데 그리 크지도 않은 해변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인다.
여름 끝자락을 붙잡고 싶어서겠지. 내 안에도 그런 마음이 있는지 일부러 걸음걸이를 천천히 했다. 그렇게 하면 흘러가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묶어 놓을 수 있다는 것 마냥. 해나도 내 옆에서 보조를 맞추어 조용히 걸었다. 당연하지만 그런 걸로는 손끝으로 빠져나가는 여름을 붙들어 맬 수 없었다. 해나와 헤어질 갈림길이 곧 나타났다.
해나가 힘차게 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한 달 동안 고생 많이 했어! 개학하면 학교에서 보자!"
나도 똑같이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그러면서 이미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학교에서 다시 마주칠 순 있어도 그때 우리는 이렇게 활기차게 인사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인사는 하겠지만, 훨씬 거리감이 느껴지는 태도일 것이다.
그걸 모르는 건지, 알면서도 일부러 그러는지, 아니면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건지.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해나의 그림자를 마지막으로 흘깃 건너다봤다.
이로써 내 인생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열 일곱 여름방학이 막바지에 다다랐다. 마지막 퇴근을 하고 피곤한 몸을 침대에 던져 밤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고 보니 절묘하게도 아르바이트 종료와 맞물려 방학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하게 됐다. 시작할 때부터 알고 있긴 하지만 막상 전부 끝내고 나니 새삼스레 다가왔다. 내 방학을 정말 다 쏟아부었구나.
오늘은 늦잠을 잤다. 엄마도 굳이 깨우려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침대에 누운 채로 상체만 일으켜 앉았다. 두 뼘 정도 열린 창문 밖에서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어제만 해도 이 시각에 시내까지 나가서 이런저런 무거운 걸 나르고 있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여유롭게 내 방에 있다니 부자연스럽다.
제법 오랫동안 반쯤 몽롱한 정신으로 그러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슬렁대며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니까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빠는 출근했을 테고, 엄마는 외출이라도 하셨나 보다. 식탁에는 엄마가 나가기 전에 차려 주신 식사가 있었다. 아무도 없는 식탁에 앉아 한 숟갈씩 천천히 밥을 먹다 보니 아무도 없는 우리집은 참 평화롭다 싶었다. 열린 베란다 창 너머에서는 매미가 자기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기라도 한 듯 있는 힘껏 울어대고 있었다. 그거라도 없었다면 완벽한 고요였을 텐데.
밥을 다 먹고 나선 휴대폰을 들고 소파에서 뒹굴었다. 그런데 한 시간쯤 지나도 집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으니 심심해졌다. 멍청히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유리창 너머 하늘을 바라보던 나는 집 밖으로 나가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오랜만에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게 있는 시간이 오자 책을 읽고 싶어졌기 때문인데, 집에서는 읽기 싫었다.
야구모자를 푹 눌러썼다. 또 책가방을 짊어 메고 밖으로 나섰다. 책가방은 보통 등교할 때 쓰던 거였는데 오늘은 달랑 책 한 권밖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지난 한 달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그 일들은 내 안에 후유증을 남겼고 앞으로도 잠잠해지려면 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우리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해변가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은 그저 발걸음이 경쾌했다. 그 다사다난했던 여름이 한 번 일단락되었다는 느낌 때문일까. 아니면 청명한 오늘 날씨가 근심들을 내리눌러 주어서일까.
해수욕장을 지나, 인적 드문 도로로. 다음으로는 나만 아는 개구멍으로. 목적지는 물론 내 비밀 해변이었다.
이제 8월말이지만 날은 아직 더웠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는 땀이 삐질삐질 흘렀지만 절벽 그늘 아래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내 해변에서는 달랐다. 사실 여기 만한 피서지도 없었다. 반대로 말하면 겨울에는 추워서 발 들이기 힘들다는 의미도 됐다. 그래도 난 겨울에도 짧게나마 여기 머무르곤 했지만.
언제나처럼 내가 늘 의자처럼 사용하던 바윗돌에 걸터 앉으려 했다. 그런데 오늘은 해가 기운 탓인지 그 자리에 그늘이 제대로 드리워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거기 앉아보려 했으나 결국 햇빛이 뜨겁고 너무 밝아 글자도 잘 안 보여서 비켜나야 했다. 그러면서도 못내 아쉬워 이렇게 중얼거렸다.
"여기에 파라솔 같은 거 하나 갖다 두면 좋을 텐데."
그 부근 바닥이 제법 평평해서 하나쯤 충분히 세워둘 만해 보여 한 말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해나와의 추억이 있는 그 옥상을 떠올렸단 것을 깨달았다. 아무도 없는데 괜시리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다 조금 떨어진 응달진 자리로 옮겨 앉았다.
가지고 나온 책은 저번에 읽다 말았던 탐정 소설이었다. 그간 일을 해서 시간이 없다고 야금야금 살짝씩만 보고 있었는데, 이 참에 제대로 끝내려고 마음먹었다. 오늘은 시간도 많았다.
책을 펼쳐 읽어 내려갔다. 소설 속에서 탐정은 신묘할 정도로 놀라운 두뇌로 수수께끼를 파헤쳐갔다. 그런 흥미진진한 장면을 읽으며 내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우습게도 해나의 검은 다이어리였다. 왜 그런 게 떠올랐을까? 내게는 그것이 탐정이 마주한 불가해한 사건에 버금가는 의문 덩어리라서일까?
얄궂은 일이었다. 나는 해나와 함께하던 시간 중 아무 때나 그 다이어리가 뭔지 물어볼 수 있었다. 펜을 들고 거기에 뭘 쓰고 있는지도. 그런데 그 많은 기회를 지나치고 나서야 그게 이렇게 궁금해지다니. 마지막 날 해나가 직접 그걸 내밀며 궁금하지 않냐고 물어봐서일지도 모른다.
그때는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런 것보다는 그걸 들고 있는 사람과의 작별이 더 중요하게 느껴져서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지난 일이 되고 보니 불현듯 너무나 궁금해졌다. 거기에 적힌 것이 대체 무엇일지.
한창 읽고 있던 것이 탐정 소설이라서일까. 나는 저도 모르게 해나와 함께했던 지난 한 달을 더듬으며 다이어리의 정체를 추리해보기 시작했다. 왠지 그 시간 사이에 있을 것만 같았다. 수수께끼의 진상을 밝힐 수 있는 단서가. 해나는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뭔가를 계속 조금씩 보여주고 있었다.
어느샌가 나는 책에서 눈을 떼고 넘실대는 파도에게로 시선을 완전히 넘기고 있었다. 그 너머에 무언가 있을 거라고 기대라도 하듯.
그렇게 내 계획보다 오래 그 해변에서 머물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디 나간 거냐고 엄마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내가 정오가 좀 지난 시각에 집에서 나왔는데 지금은 오후 5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평소에 여길 오곤 하던 때와 비교해도 상당히 오래 있던 편이다. 더 특이한 점은 그렇게 시간이 흐를 동안 제대로 의식도 못 하고 있었던 것, 그리고 기껏 가져온 소설은 겨우 몇 십 페이지밖에 못 읽었다는 거였다.
엄마한테는 그냥 집에 있다 보니 심심해서 잠깐 산책 나왔으니 금방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드니 햇빛의 각도가 달라져 해변의 거의 전부가 그늘에 잠겨 있었다. 내가 앉지 못해 아쉬워했던 바윗돌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몇 시간 동안 바닷바람을 맞다 보니 추워지기까지 했다.
모자를 고쳐 쓰고, 소설책을 도로 책가방에 넣었다. 들어왔던 개구멍을 되짚어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마자 차도에서 스타렉스 한 대가 부아앙 하고 큰 소리를 내며 지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