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의 집 16화

내 마음 설익어 떫은 맛 가득하던 계절에

by 하이드

엄마가 연락을 한 것은 단순히 내가 집에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늘 저녁에 이모네와 만나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는 거였다. 이모 집과 우리 가족은 별다른 용건이 없어도 이런 식으로 자주 만난다. 그런데 근 한 달 동안은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고 사촌 누나도 발목을 다쳐서 그런 자리가 없었다. 이젠 나도 개학을 앞두고 있고 누나도 그럭저럭 잘 걷게 되었다고 하니 한 번 자리를 만들었나 보다.


7시쯤에 집에서 멀지 않은 삼겹살 집에서 만났다. 부모님이랑 고깃집에 온 것도 오랜만이라 나도 환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모네 식구도 도착했다. 누나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잘 걷긴 했지만 아직 깁스를 풀진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깁스 위에 온갖 낙서들이 어지러이 덧칠된 것이 달라진 점이라고 할까. 나도 미리 뭐라도 끄적여 둘걸.


곧 불판 위에 고기가 올라가 지글지글 연기를 냈다. 식탁 위 분주한 과정이 마무리되고 여유가 생기자 친척간 대화가 제대로 오가기 시작했다.


"승연이는 방학 동안 일 열심히 했니? 이제 고1이라 힘들었을 텐데 잘했네."


"아니에요. 생각보다 그렇게 많이 힘든 일은 없더라고요."


"맞아, 엄마. 거기 진짜 일하기 편해. 그러니까 내가 얘를 소개해줬지."


"누나는 그냥 조용히 있어주면 안 돼?"


누나는 내 핀잔에도 그저 장난스럽게 키득대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대학 가려면 이제부터 신나게 공부 시작해야 될 텐데. 그 전에 좋은 경험했지 뭐."


그 말은 맞았다. 그런 면에서 이번 여름방학은 여러모로 타이밍이 잘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경험도 해보고, 용돈도 벌었고, 해나도 만나고.


나는 약간 어두운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 먹는 데 집중했다. 어쩐지 누나가 입을 샐쭉하게 내밀고 나를 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저녁 식사는 8시가 좀 지나서 끝났다. 식당 밖으로 나와서 가족끼리 갈라지려고 할 무렵이었다. 누나가 내 팔뚝을 덥석 붙들더니 어른들에게 말했다.


"저 승연이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사주고 들어 갈게요. 저도 이제 개강하고 서울 올라가면 한동안 못 볼 테니까 얘기 좀 하려고."


"내 의사는 안 물어보고?"


"싫냐?"


"아니. 괜찮아."


어른들도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그렇게 누나가 내 팔을 붙들고 끌고 간 곳은 아이스크림 가게가 아니라, 식당 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벌써 해가 진 시각이었는데도 앉아서 수다를 떠는 사람들이 절반 가까이 좌석을 채우고 있었다. 불만은 없었다. 나는 시원한 빙수를, 누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몇 분 후 누나가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한 모금 쭉 빨아들이고는 내게 물었다.


"그래서 인생 첫 알바는 좀 할 만하던?"


"그럭저럭."


"내 얼굴에 먹칠은 안 했고?"


"누나 얘기는 나오지도 않았어."


누나는 괜히 딴전을 피우며 '사람들이 박정하네' 따위로 중얼대다 다시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 여자애랑은 좀 친해졌니?"


또 그 소리야. 나는 이젠 성가시다는 기색을 팍팍 내보이며 빙수를 퍼먹었다. 심지어 보기만 하는 그 소리가 내 심중을 제대로 맞췄다는 사실이 더욱 기분 나빴다. 그간 내 가장 큰 관심사가 해나였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친해지긴 했어."


"그거 잘됐네. 알바하면서 얻은 게 되게 많다, 그치?"


나는 한숨을 쉬었다.


"절친이 된 것도 아닌데 무슨 의미야. 이제부턴 멀어지겠지 뭐."


엉겁결에 누나에게 고민의 일부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테이블 반대편에서 누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처음에는 짜증난다고 생각했는데,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의외로 지금 이 자리는 괜찮은 기회인지도 몰랐다. 내가 여름 방학을,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겪으며 얻은 혹덩어리들은 누군가에게 따로 털어놓기가 힘들어서 문제인 것들이었다. 부모님에게 상담하기 쉽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친구들은 말하기 쉽고 어렵고를 떠나 아예 걔네 자체가 고민거리였다.


그에 반해 누나는 괜찮은 경청자가 될 수도 있을 듯했다. 물론 입은 좀 싸지만 나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고 있고, 나이도 나보다 많으면서 대하기 어렵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 편해서 문제인 사람이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발견하지 못했던 누나의 어른스러운 일면이 존재할 수도 있었다.


"그럼…… 말해본다."


누나는 자기만 믿으라는 듯 으스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재차 한숨을 쉬었다.


"일하면서 해나랑 친해지긴 했거든. 둘 사이에 그렇게 나쁜 일도 없었고."


문득 시내에서 우연히 한 번 마주친 걸로 잠깐 어색해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일이 딱히 커졌다고는 보기 어려웠으니 방금 내가 한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그래서 그 일은 적당히 넘기고, 그 때문에 있었던 친구들과의 갈등으로 얘기가 넘어갔다. 처음에는 가벼운 태도로 듣던 누나도 조금씩 진지해지는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면 진지하다기보다는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참 나. 너네 친구들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자고 숨만 붙어 있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되게 섬세하네."


역시 누나에게 상담하는 건 실수였을까?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이어서 남은 얘기까지 모두 털어놨다.


"그래서…… 사실 괜히 이런 걸로 앓을 필요도 없을 것 같긴 해. 친구들하고는 좀 싸웠을 뿐이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고. 해나하고도…… 솔직히 문제는 없는 거잖아. 이제부턴 좀 멀어질 것 같지만 그걸 문제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이상하네. 왜 멀어질 거라고 생각해?"


"그렇잖아. 애초에 같이 노는 그룹이 다른데 어떡해? 해나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당연히 그렇게 되지."


"그거 생각보다 무지 복잡하네."


그렇게 말하며 누나는 커피를 한 번 더 쪽 빨았다.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맑은 눈망울에 내 복장이 터진다.


"그럼 네가 해나라는 애 좋아하는 건 맞는 거지?"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정확히는 뭐라고 말하려다 목구멍이 콱 막혀버렸다. 피식대며 나를 건너다보는 누나의 은근한 시선이 정말 기분 나쁘다.


"그럼 태도를 똑바로 해. 여자애 좋아하는 마음도 제대로 못 놓고, 그것 때문에 친구들이랑 싸우는 건 싫고. 너무 애매하잖아, 지금."


"이제와서 그래봤자…… 둘 다 이미 끝난 일이잖아."


"끝난 일인데 왜 나한테까지 이런 말을 하고 있어?"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으니까 그렇지."


"그게 바로 이도저도 아닌 태도 아니니?"


그러자 누나는 나한테 말도 없이 내 빙수를 몇 숟갈 연달아 퍼먹었다. 그리고 꿀꺽 삼키고는 다시 나를 봤다.


"확실하게 해야지, 어쩌겠어? 계속 걔랑 친하게 지내고 싶으면 친구들하고도 풀어야 겠지. 지금 잠깐 화해한 것처럼 보여도 언젠가는 다시 그 얘기가 나올 것 아냐?"


"말했잖아. 어차피 아무것도 안 해도 해나랑 나는……"


"그냥 네가 찌질해서 핑계대는 거잖아. 아니야? 너 같으면 방학 때만 잠깐 보고 본체만체할 애하고 그렇게 붙어있고 싶어? 옥상에 무거운 물건들까지 옮겨 가면서? 걔가 무슨 외계인인 줄 아니? 사람 생각 다 거기서 거기야."


거침없이 늘어놓는 누나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눈만 깜빡였다.


"네 말 대로 그냥 이대로가 좋으면 아무것도 안 해도 돼. 해나랑 멀어지면 친구들하고 다시 다툴 일도 없을 거잖아. 아무런 문제없지. 괜히 갈팡질팡하지 말고 네 마음만 확실히 정하면 될 일 같은데. 아니니?"


누나가 한참을 늘어놓고 나서도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숟가락으로 반쯤 녹은 빙수만 뒤척였다. 누나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누나가 할 만한 신랄한 지적이긴 한데, 그 내용물이 이런 모양새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겨우 목소리를 짜내 이렇게 말했다.


"외계인이…… 맞을지도."


그 말을 듣자 누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악의가 있는 웃음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네가 그럼 그렇지, 하는 짓궂음이 담겨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빙수 그릇만 휘저었다.


거기까지가 그날 누나와 주고받은 대화의 중요한 부분 전부였다. 이윽고 카페를 나서 누나와 함께 집으로 걸어갈 때도 나는 말을 별로 많이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떠오르는 건 해나의 검은 다이어리였다. 누나에게 그렇게 신랄한 소리를 한껏 듣고도 그 다이어리에 관한 의문만은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안녕하세요, 학우 여러분.


자유로웠던 여름방학을 뒤로하고 새삼 낯설게 느껴지는 교실로 돌아왔습니다. 한결 시원해진 바람이 반겨주네요. 아직은 햇살이 쨍쨍하지만 곧 낙엽이 익어갈 거예요. 그만큼 학우 여러분을 조금 더 성숙하게 만들어 준 여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올해도 이미 절반도 넘게 지나고 말았네요. 그래도 아직 우리에게 남은 새학기가 기대되는 까닭은 앞으로 쌓아갈 우리 추억이 기대돼서인 것 같습니다.


아직 방학의 여운이 다 가시지 않았지만, 벌써 다음달 초에 한마음으로 스포츠맨십을 겨룰 운동회가 있고, 그 다음달에는 모두가 즐거운 축제가 있을 예정이에요. 저는 이미 기대감으로 가슴이 뛰는 것만 같네요.


물론 한숨 돌리며 추억을 쌓아갈 행사들을 기다리는 것도 즐겁겠지만요. 우리의 본분인 학업 역시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다같이 행복한 추억을 쌓고, 지성 역시 한 단계 성장하는 학우들이 되도록 해요. 특히나 11월에 수능시험을 앞둔 3학년 선배님들. 헤어지는 건 아쉽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성과를 이루기를 기원합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제가 좋아하는 시 한 구절로 마무리하도록 할게요.




내 마음 설익어


떫은 맛 가득하던 계절에


너를 만나 성마르게


떨어지려 하더니


아차 하고 손을 떼어


조금 더 무르익게 두었네


돌아서 가는 길에


못내 아쉬워


뒤돌아 향기라도 맡아볼까


싶었네




그럼 개학 날 점심시간에, 1학년 4반 방송부 이해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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