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거 다신 안 하려고."
고등학교 점심시간. 하루 중 혈기왕성한 학생들의 전투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때. 여름방학의 잔향을 쫓아 반쯤 몽롱하게 창밖을 쳐다보던 학생들은 이 시각을 기점으로 순식간에 본래의 학교 생활로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한 시간이 약간 안 되는 동안 전교가 왁자지껄하더니 5교시 수업이 시작하기 몇 분 전이 되어 소란이 약간 가라앉을 무렵. 나는 우리 반 교실로 들어오다 교내 스피커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처음 들렸던 숨소리까지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이어 '안녕하세요, 학우 여러분'이라고 하는 말에는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긴장했는지 '안녕' 부분에서 혀를 살짝 씹은 것도, 이어 민망해서 지어버린 웃음소리까지 여과 없이 방송을 탔다. 거기부터는 해나의 목소리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그제야 어렴풋하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맞다. 해나는 방송부라고 했지. 잘나가는 애들이 들어가는 곳.
방송의 내용 자체는 첫 마디만 들어도 전체 내용이 대강 짐작이 갈 정도로 뻔했다. 그렇지만 동급생의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런 방송이 나오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졌는지 대부분의 학생들은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았다. 시작 부분의 사소한 실수도 오히려 약간의 웃음기와 함께 내용에 집중하게 만든 듯했다.
시를 낭송하는 부분에 와서는 대부분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악의는 없지만 다소의 짓궂음도 함유된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나는 약간 화가 났다. 구체적으로 화를 낼 대상도 없으면서 말이다.
마지막에 이르러 해나의 이름을 확인할 즈음이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내 등을 떠밀었다. 돌아보니 동급생 하나가 불만스럽게 날 보고 있었다.
"안 들어가?"
"아…… 미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교실로 들어가는 문을 막은 채 서 있었다. 날 민 녀석 말고도 그 뒤에 다른 사람들이 줄처럼 늘어선 게 보였다. 얼른 사과를 하고 내 자리로 가서 앉았다.
5교시 수업은 비몽사몽한 상태로 흘러갔다.
쉬는 시간. 나는 홀연히 일어나 복도로 나섰다. 해나가 4반이라는 것도 오늘 처음 알게 됐다. 그리고 용건도 없으면서 나는 굳이 그렇게 알게 된 해나의 교실로 가고 있었다. 이유를 대자면 그냥 며칠 만이니까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
교실 문이 열려 있기에 나는 복도에서 살며시 안쪽을 엿봤다. 그 뾰족한 눈매와 좁은 입가는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왜냐하면 해나는 많은 친구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었다.
"뭐야! 이해나 혀 씹은 거 들은 사람 있어?"
"그거 듣자마자 방송 망하는 줄 알았어!"
"야 그만 좀 놀려! 멀쩡히 끝냈으니까 됐잖아!"
"근데 그 시는 뭐였어?"
"그거 할 때 목소리 엄청 깔더라!"
그 많은 친구들은 해나의 첫 방송을 화제로 해나를 열심히 놀리고 있는 듯했다. 멀리서 봐도 진짜로 괴롭히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되려 추켜세울 겸 장난삼아 지분대는 것에 가까웠다. 해나 역시 얼굴은 달아올랐으면서도 기분 나쁜 기색은 없이 계속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듣자 하니 그 시 낭송은 원래 대본엔 없었는데 해나가 직접 추가한 거라고도 했다. 다 같이 들었으면 하는 시라서 특별히 골랐다는데, 그것 역시 사소한 놀림감이 되는 중이었다.
나는 얼마간 복도에 서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오래는 아니었다. 남의 교실 앞에 너무 오래 서 있으면 이상하게 보일 테니 오래 지나지 않아 우리 반으로 돌아와야 했다. 해나는 끝까지 내가 거기에 있었던 걸 모르는 것 같았다.
개학.
학생치고 그 단어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이번에 나는 스스로도 의외일 정도로 꽤 덤덤했다. 방학 때도 일찍 일어나며 규칙적인 생활을 했기 때문에 별로 달라질 게 없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방학 첫 주는 굴곡 없이 흘러갔다. 평범하게 수업 듣고, 집에 돌아가서는 공부를 했다. 고등학생 첫 여름방학 까지는 비교적 여유로웠지만 이제부터는 바짝 공부해야 된다는 말을 여기저기서 들으니 약간 겁이 났던 것도 있다. 집과 학교만 왕복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그 사이에 있는 내 비밀해변에는 그동안 발을 들이지 않았다.
점심시간에는 주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내 독서 경향은 보통 소설이나 에세이의 비중이 컸다. 시집을 자주 읽지는 않았다.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예쁘다고만 느껴지는 문장들은 무슨 뜻인가 한참을 고민해봐도 잘 모르겠어서 머리가 복잡해지기 때문에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그런 것에 정답이 없다는 거야 알지만 어떻게든 알아내고 싶어지는 거였다. 그냥 예쁘다고 느끼기만 해도 충분할 텐데 말이다.
어쩌면 개학 첫날 들었던 해나의 방송의 영향이었을지도 몰랐다. 점심시간마다 도서관을 들락거리던 나는 시집 한두 권에 손을 뻗었다. 역시나 알쏭달쏭한 문장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간 내게 무슨 변화가 있기는 했는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사람이 마주보고 대화를 하면서도 도통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할 때도 종종 있는데, 세상에 있는 모든 언어에 명확한 답이 필요하지는 않겠지. 내가 어떤 문장에 어떤 결론을 내린들 남이 뭐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개학하고 첫 주말이 지난 월요일, 점심 시간이었다. 같은 반인 규진이와 함께 도서관에 올라가 꽂혀 있는 책등 위를 손가락으로 훑고 있을 때였다. 우리 학교 도서관은 꽤 큰 편이어서 별로 인기 없는 책꽂이들 사이로 들어오면 금세 주변이 고요해졌다. 책들의 페이지 사이에 기록된 소리에 소음이 먹혀버리고 마는 것인지.
제목을 감상하며 옆으로 한 걸음씩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러다 그만 왼쪽에 웅크리고 책들을 구경하던 아이 한 명을 보지 못하고 부딪히고 말았다. 나는 그나마 얼른 중심을 잡았건만, 쪼그리고 앉아 있던 그 애는 그만 가볍게 자빠져버렸다.
"미, 미안!"
놀란 내가 서둘러 사과했다. 그러자 '아야야'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그렇게 나는 개학하고 일주일만에 처음으로 해나와 눈을 똑바로 마주보게 되었다.
전혀 예상 못한 뜬금없는 타이밍에 마주쳐서 그런가. 나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그러는 사이 해나는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 일어서야 했다. 그러고도 불만도 없는지, 몸을 한두 번 툭툭 털더니 밝은 얼굴로 인사했다. 갑자기 밀쳐져서 화나지 않았을까 걱정한 내가 무색해졌다.
"승연이네? 오랜만이다, 야. 어떻게 지내?"
따지고 보면 그렇게 오랜만은 아니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이틀 후에 개학을 했고, 오늘은 개학한 지 일주일 째였으니까. 그래도 해나는 나를 정말 오래간만에 보는 느낌인가보다.
"나야 맨날 똑같지 뭐."
우습긴 하지만 점심시간에 도서관에서 마주쳤다는 게 스스로 마뜩잖게 느껴졌다. 도서관에 자주 오는 사람은 약간 샌님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지금까진 그런 걸 의식한 적도, 부끄러워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막상 지금 여기서 해나를 마주치니 어째선지 열없어졌다. 해나한테는 내 진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해나, 너는 이런 데 잘 안 올 것 같았는데."
해나가 입술을 미묘하게 내밀었다.
"사람 무시해? 나도 도서관 쓸 줄 알거든?"
그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때 해나의 오른손이 다가오더니 내 왼쪽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럼 독서 잘해. 난 갈게."
그런 말을 남기고 해나는 나를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 가려 했다. 가만히 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 조용하던 나는 해나에게 불쑥 말을 걸었다.
"저번 방송 잘 들었어."
해나가 수줍은 미소를 띠고서 나를 돌아봤다.
"너까지 왜 그래? 그걸로 또 놀리려고?"
"아니, 그런 거 아닌데…… 진짜 잘했다고 생각해."
"정말? 다행이네! 난 전교에서 다 바보 같다고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그리고 혼자 키득대는 해나에게, 나는 침을 삼키고 다시 말했다.
"그 시는 누가 쓴 거야?"
그 말을 들은 해나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는 듯했다. 이유는 몰랐다.
"시?"
"방송할 때 네가 읊었던 시 있잖아. '내 마음 설익어'로 시작하는 시."
잠깐 정적. 해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내게 손을 휘저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어디서 읽었는데, 듣기 좋은 것 같아서 대본에 넣어본 거야. 그걸로 얼마나 놀림받았는지 모르겠네. 그런 거 다신 안 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