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의 집 18화

막 개학했을 때의 현실감 없는 기분은 금세 사라졌다.

by 하이드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해나는 정말로 내게 등을 돌리고 도서관을 나갔다. 나는 잠깐 해나가 있던 자리를 보다가 다시 책꽂이로 시선을 돌렸다. 결국 예상했던 대로였다. 어쩌다 마주치면 인사나 한두 번 주고받는 사이. 그렇게 됐다.


애초에 우리 둘 사이에 뭐가 있다고 그게 아쉬운 건지. 꼭 내가 아니더라도 그런 게 자연스러운 거잖아. 안 그래? 무시하지 않고 다정하게 인사해주는 걸 다행으로 여겨.


한 발짝 더 안으로 들어가 해나가 무슨 책을 보고 있었는지 한 번 살펴봤다. 그때 익숙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규진이었다. 규진이가 내게 말을 걸었는데 도서관이니 소리를 죽였지만 그 속에 다소 돋아난 가시는 느낄 수 있었다.


"좀 전에 지나간 여자애."


"걔가 왜?"


"저번주에 방송했던 애 맞지?"


"응. 맞아."


"쟤가 걔야?"


규진이의 말 자체는 있어야 될 정보가 과하게 생략되어 제대로 된 질문으로 보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친구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대충 알아들었다.


"너랑 같이 알바했다던 걔 맞냐고?"


금방 입을 열지 않자 규진이는 내가 자기 말을 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그렇게 덧붙였다. 괜히 나를 다그치는 것 같은 느낌에 일부러 좀 딱딱하게 답했다.


"맞는데. 왜?"


"둘이 별로 친하지도 않다며?"


"안 친해. 지금 보고도 모르냐. 그냥 인사만 하고 갔잖아."


그러고도 규진이는 석연찮은 기색이었다. 나는 몰래 한숨을 쉬었다. 규진이가 소심하다 못해 약간 삐딱한 점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저렇게까지 반응하는 건 좀체 이해가 잘 안 갔다. 옛날에 자길 괴롭혔던 녀석들과 해나가 같이 어울린 적이 있다고 저렇게 나오는 것이다. 자기 딴에는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리는 법이니 해나도 곱게 보이지 않는가 보다지만,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다른 건 몰라도 해나가 나쁜 애라고는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다.


"됐어. 쟤는 원래 친구 많아. 나는 친구도 아니고 그냥 아는 사람이고."


규진이는 내가 해나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그리 기껍지 않은 듯했다. 그래도 저번 농구장에서 한바탕 싸우고 유야무야 화해한 일을 떠올렸는지 더 문제 삼으려 하진 않았다. 못마땅한 얼굴이 됐을 뿐.


"됐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책이나 골라."


나는 그렇게 말한 후 몇 걸음 더 안쪽으로, 조금 전까지 해나가 있던 자리로 들어갔다. 일부러 찾은 건 아니었는데 시집이 주르륵 꽂힌 책장이 나왔다. 이왕 눈에 띈 거 하나 읽어보자 싶어 손을 들어 한 권을 빼냈다.




일찍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며 세수한다. 엄마가 차려 주신 아침을 먹고 등교한다. 오전 수업을 듣고 나면 또 금방 점심 먹을 시간. 오후 수업이 시작하기 전까지 남는 시간은 도서관에서 책을 보며 때운다. 오후 수업을 듣고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공부하다 집에 들어온다. 그런 생활이 계속 이어져서 한 번씩은 날짜나 요일도 헷갈리곤 했다.


그런 생활 속에서 막 개학했을 때의 현실감 없는 기분은 금세 사라졌다. 그저 하루하루 기계적으로 똑같은 일을 수행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날짜가 훌쩍 지나 있었다. 그렇게 개학을 하고도 2주가량이 흘렀을 무렵이었다. 해나의 방송에서 9월 초에 운동회가 있을 거라고 했던가. 이제 슬슬 그 준비에 들어갈 때였다.


5교시 수업 시간 하나가 통으로 운동회 선수를 정하는 데 쓰였다. 선생님 없이 반장이 교탁에 나가 지원을 받았다. 지원자가 정 없으면 반장이 알아서 지목을 하거나, 추천을 받거나, 그냥 주먹구구로 아무렇게 정해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축구, 발야구, 피구 등에 나갈 인원들이 차례차례 정해졌다. 남은 건 운동회의 마지막을 장식할 남녀 혼합 이어달리기 계주뿐이었다. 나는 전체적으로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흘러가는 대로만 고개를 끄덕이며 앉아 있었다. 축구에 참여하게 되긴 했는데 원래 사람이 많이 필요한 경기니까 자연스럽게 들어갔을 뿐이었다. 그거 말고는 따로 더 나가게 될 일도 없을 줄 알았다.


한데 별안간 교실 구석에서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더니 외쳤다.


"승연이가 잘 뛰던데. 계주 시키는 게 어때?"


"뭐?"


예상치 못한 지목에 얼빠진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날 추천한 건 평소에 별로 친하지도 않은 녀석이었다. 대관절 왜 갑자기 날 들먹이는지 황당할 따름이었다.


"난 계주 같은 거 해본 적도 없는데? 내가 잘 뛴다고 누가 그래?"


"너 전에 100미터 달리기에서 되게 빨리 들어온 적 있잖아. 체육시간 때 했던 거."


듣고 보니 1학기에 그런 적이 있는 것 같긴 했다. 기록이 괜찮았던 게 거짓말까진 아니었지만, 그렇게 독보적으로 빨랐던 것도 아니었다. 같이 뛴 조의 다른 애들이 느렸던 것도 한 몫 했을 뿐이었다.


나는 계주 같은 자리는 원했던 적도 없었기 때문에 한사코 거절하려 했다. 그러나 슬슬 종이 칠 시간이 다가와서인지, 일을 빨리 끝내고 싶어 보이는 반장은 그대로 날 계주로 확정시켜버렸다.


꽤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계주라고 하면 전교생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 반을 대표해서 뛰어야 되는 선수 아니던가. 태어날 때부터 남들 시선을 받는 것과는 거리가 먼 내가 어쩌다 이런 걸 맡게 된 거지?


얼떨떨한 가운데 몇 시간 지나고 나니 이젠 이의를 제기하기도 어려워지고 말았다. 자습 시간이 시작하기 전인 저녁. 어쩌다 보니 세찬이랑 같이 운동장으로 나오게 됐다. 마침 농구 골대도 비었길래 둘이서 적당히 공을 던지고 놀았다.


"야, 세찬아."


"왜?"


"나 우리 반 계주하기로 했다."


농구공이 링을 때리고 튕겨 나왔다. 팅, 하고. 공을 낚아챈 세찬이는 의외라는 듯 나를 봤다.


"너 그런 거 안 좋아하지 않냐?"


"맞아. 별로 안 좋아해. 근데 어쩌다 보니 하게 됐어."


그 정도로만 설명했을 뿐인데 세찬이는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세찬이네 반도 일이 돌아가는 건 비슷할 테니까.


세찬이는 도움닫기를 몇 번 하다 다시 농구공을 던졌다.


"그렇게 됐으면 열심히 해라."


"굳이 열심히 할 필요가 있나? 못하지만 않으면 되지."


"이왕 하는 거 잘하면 좋잖아."


그 말도 틀린 소리는 아니지만. 나는 입맛을 다시며 괜히 발끝으로 운동장 모래를 찼다. 세찬이가 다시 말했다.


"개학하고 나서 규진이하고는 별일 없었어?"


세찬이도 나와 규진이 사이가 계속 신경 쓰이긴 하는 모양이었다. 우리 넷은 약간 싸운 것 정도는 별거 아니라는 듯 묻어버리고 잘 지내고 있었으나 진정으로 전부 다 잊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문득 저번에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잠시 생각을 좀 해봤지만 곧 그건 별일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따로 얼굴을 붉히거나 말다툼을 한 것도 아닌데.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그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세찬이가 던진 공이 그물을 흔들고는 내 방향으로 오는 게 보였다. 손을 뻗어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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