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의 집 19화

보는 사람이 좀 있으면 어떠랴. 뛰는 게 잘못된 것도 아닌데.

by 하이드

세찬이가 한 말이 틀린 소리는 아니라 해도 내겐 별로 와닿지 않았다. 계주를 하게 된 건 내가 원해서가 아니었다. 선출된 과정은 불합리하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런 판에 그렇게까지 최선을 다할 의욕은 내게 없었다. 운동회 같은 거야, 당일에는 승패에 열광하는 그림이 나올지 몰라도 사흘만 지나면 그런 게 있었는지도 기억 안 난다는 분위기가 되니까. 그렇다고 아예 아무것도 안 하는 것 또한 바람직하다고 할 순 없으니, 내 목표는 그저 중간만 하자는 거였다.


운동회 날까지는 2주가 남았다. 그 때문에 한동안 학교는 준비하느라 바쁠 예정이었다. 수업 사이사이에 운동장으로 나가 줄넘기를 하고, 축구 연습경기를 하는 날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점심 시간이 지난 오후에 각 학급별로 계주 선수들이 모이게 됐다. 1학년 반은 4개였고, 각 반마다 남자 2명, 여자 2명이었으니 총 16명이었다. 체육 선생님은 1반과 3반, 2반과 4반끼리 묶어 한 경기씩 뛰게 했다. 나는 2반이었으므로 4반과 경주를 하게 됐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1반과 3반이 달리는 모습을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막 첫 번째 배턴이 손에서 손에서 옮겨가는 게 보일 참에, 누군가 내 한쪽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게 느껴졌다. 같은 반 중 한 명이 장난치는 줄 알고 대수롭잖게 돌아봤다. 그런데 느닷없이 해나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안녕? 너도 계주야?"


솔직히 적잖이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했다. 태연하게 입을 열려 했는데 내 입에서 나오는 말투가 까닭 없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응. 어쩌다 그렇게 됐네."


"진짜? 나도 그런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더라. 난 달리기도 잘 못하는데 말이야."


저 말은 어디까지 사실일까.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내가 어물어물 단답으로만 대답하는 사이 해나는 뭐라고 몇 마디 더 하며 까르르 웃더니 곧 내게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언제 그렇게 내게 사근사근했냐는 듯 자기 반 친구들과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나도 더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운동장 가운데서 펼쳐지는 계주 시합에 시선을 고정했다. 학교 건물에서도 창문을 열고 꽃게처럼 밖을 빼꼼히 엿보는 눈들이 한아름이었다.


1반과 3반의 대결은 3반의 승리로 끝났다. 다음은 우리, 2반과 4반 차례였다. 연습이긴 해도 막상 뛰려고 하니 긴장이 엄습했다. 첫 주자를 출발시킬 선생님의 신호가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하나, 둘, 셋…….


첫 번째 주자가 내달렸다. 여자 두 명이 먼저 뛰고, 나머지 남자 둘이 이어서 마무리하는 식이었다. 내 차례는 세 번째였다. 해나는 두 번째. 처음에는 양쪽이 거의 비등하게 달리더니 두 번째 주자부터는 우리 반이 조금씩 처졌다. 하지만 거의 엎치락뒤치락하는 수준이었기에 역전이 아주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두 번째 주자가 넘겨주는 배턴을 받았는데, 특별한 실수를 하지 않았는데도 일찍부터 상대랑 슬슬 차이가 벌어져갔다. 나는 내심 당황해서 더 열심히 뛰었다. 그래도 거리가 벌어지는 속도만 조금 줄어들었을 뿐이었다. 결국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다음 주자에게 배턴을 넘겨야 했다. 내가 준 배턴을 받은 친구도 열심히 뛰었으나 결국 이미 벌어진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우리가 졌다.


승리에 환호하는 4반과는 대조적으로 우리 반 팀은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짚거나 다소 힘 빠진 모습을 보였다. 그나마 서로 남 탓을 하지는 않는 게 다행이긴 했다. 서로 등을 두드려주며 격려도 해줬다. 4반에선 운동 잘하기로 유명한 남자애들이 나와서 어쩔 수 없었다는 둥. 그래도 역시 이긴 팀의 활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제 경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다들 감 잡았지? 오늘은 연습이니까 오늘 졌다고 당일에도 진다는 법은 없어. 그러니까 괜히 기죽지 말고 이기고 싶으면 열심히 연습해오면 된다. 이상, 교실로 들어가."


나는 터덜터덜 걸어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 본관으로 향했다. 대충 적당히만 뛰자고 생각했으면서 정작 지게 되니까 승부욕이 조금씩 고개를 쳐들었다. 내 안에도 이런 감정이 있었던가.


저 앞에는 멀찌감치 떨어져 걷고 있는 해나가 있었다. 여기에서도 해맑게 웃는 표정은 잘 보였다. 처음에 인사했을 때 말고는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날은 학교가 끝나고 일부러 좀 먼 길을 돌아 집으로 갔다. 파도 소리가 들리는 해변 가까이 붙은 길이었다. 이미 해가 진 지 한참 지난 시각이었기에 먼발치로 보이는 해수욕장은 거대하게 펼쳐진 검은 구덩이 같았다. 벌써 9월. 올해도 후반에 들어섰다. 아직도 낮에 햇빛이 내리쬘 때는 덥다고 느낄 정도의 날씨긴 했지만 이렇게 해가 완전히 모습을 감춘 마당에 이렇게 바닷바람을 맞고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옷깃을 여미며 모래사장을 내려다봤다.


한 달 전만 해도 그렇게나 북적거리던 해수욕장은 놀랄 만큼 황량하게 변해 있었다. 미처 다 치우지 못한 쓰레기들, 슬리퍼 한 짝이나 수건 같은 것들이 나뒹굴고 있을 따름이었다. 매년 보는 풍경이긴 해도 오늘따라 그 변화가 더욱 극적으로 보였다.


인적도 드문 인도 위에서 바닥에 동그랗게 퍼진 가로등 불빛이 징검다리라도 되는 양 껑충대며 걸었다. 그러다 갑자기 왜 그런 충동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불현듯 이유 없이 마구 달리고 싶어졌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아니지. 보는 사람이 좀 있으면 어떠랴. 뛰는 게 잘못된 것도 아닌데.


조금씩 속도를 내다가 나중에는 밝은 길이 나올 때까지 있는 힘껏 달음박질쳤다. 마지막에는 아예 환호성까지 질렀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위치까지 와서야 허리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었다. 몸이 더워지며 미간으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주말이 돌아왔다. 아직 시험기간도 아니었는데 이런저런 일로 벌써부터 분주해진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좋은 휴일이었다. 그럼에도 머릿속은 여유보다는 복잡한 생각들이 차지한 비중이 더 컸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이 비밀해변에 방문할 적당한 날이라고 결론 내렸다. 아직 낮에는 덥긴 해도 완연히 가을이라고 할 계절이 되기도 했으니. 이제 두어 달만 지나면 추워서 거기 갈 엄두도 못 낼 것이다. 마침 읽고 싶은 책도 생겼다.


오후 2시쯤 되어 해변에 도착했다. 저번에 밤의 해변가를 걸으면서도 느낀 거지만 바닷바람의 느낌이 한 달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더운 습기를 머금었던 공기가 피부 표면을 얕게 파고드는 뭉툭한 송곳 같은 감각을 품었다.


아직까진 시원하다고 느껴질 수준이었다. 나는 애용하는 바윗돌에 걸터앉아 오늘의 책을 꺼냈다. 학교 도서관에서 대출한 시집이었다. 사실 이보다는 더 일찍 완독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축구 예선전하랴 계주 연습 경기하랴 정신이 없는 통에 제대로 들춰 보질 못했다. 그래도 저번에 애먹었던 탐정 소설보단 시집이 더 얇고 앞 내용을 기억할 필요가 없었으니 다행이었다.

이전 18화파도의 집 1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