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심만 한다고 이뤄지는 일은 아니다.
이제야 깨닫게 된 사실이었지만 가을의 이 해변은 시집을 읽는 데 무척 적당한 곳이었다. 기온은 적당했고 바람은 시원했다. 바닷물은 내 쪽으로 백색소음을 퍼다 밀어주고 있었다. 그 정취에 녹아드는 듯한 감각과 함께, 나는 눈에 보이는 문장 한 줄마다 반드시 확실한 해석이 없어도 괜찮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가지런히 밀려왔다가 둥그렇게 말려들고, 끝내 부서져 바다로 돌아가는 파도처럼. 그렇게만 받아들여도 될 것 같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슬그머니 배가 고파졌다. 아직 저녁 때라고 하긴 이른 시각이긴 했는데 찬 바람을 정면에서 너무 오래 맞아서 그런가보다. 처음에는 무시하고 책이나 계속 읽으려 했지만 한 번 허기를 의식하자 그걸 머릿속에서 지우기가 쉽지 않았다. 한창 성장기니까 어쩔 수 없지. 따져보면 그래도 여기서 두세 시간은 시간을 보냈고 남은 페이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읽기로 하고 돌아갈 마음을 먹었다.
읽던 책을 가방에 넣고는 한 번 더 수평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기서 떠나기 전에 한 가지 더 할 것이 떠올랐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스마트폰을 꺼냈다. 누나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한참을 이어졌다. 안 받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수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윤승연 네가 웬일로 나한테 전화를 다 하냐?"
전화를 받자마자 누나가 대뜸 내뱉은 그 말은 핵심을 찔렀다. 내가 누나에게 전화를 거는 건 드문 일이었다.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아도 평생 지겹게 마주치며 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막상 전화기에 대고 말을 하려니 첫 마디가 잘 떨어지지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편한 사람 중 하나인데도.
"그러니까…… 누나, 발목은 다 나았어?"
"내 걱정을 다 하는 걸 보니 분명히 나한테 뭔가 원하는 게 있구나."
나는 평생 누나가 바보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최근에는 실은 똑똑한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틀린 말은 아닌데. 내가 누나한테 뭘 달라는 건 아니고……."
"그럼?"
"그냥 몇 가지 물어보고 싶어서. 혼자 고민을 많이 해봤거든. 전에 누나가 해준 말에 대해서."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해줬더라?"
역시 바보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짜증이 솟기도 했다. 일단 내색 없이 저번에 카페에서 해준 얘기라고 하자 금방 알아듣겠다는 반응이 나오긴 했다.
"그 얘기가 왜?"
"누나가 나한테 말했잖아. 해나가 좋으면 제대로 표현하라고. 내가 만약 그 말대로 하면…… 아니 한다는 건 아니고, 만약에 말이야. 그렇게 하면…… 해나랑 잘될 수 있을까?"
누나는 뭘 하고 있었는지, 전화기에서 한동안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끊기는 건 아닌가 걱정도 했지만 다행히 곧 다시 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걸 나한테 물어봐?"
몸에 힘이 탁 풀린다.
"누나가 나보고 그렇게 하라며?"
"얘는 사람 말을 뭘로 들은 거야? 내가 언제 고백하라고 시켰니? 난 태도를 똑바로 하라고 했어."
나는 그대로 행동을 멈췄다. 둘은 다른 건가?
"넌 여자애도 포기하기 싫고 네 친구들이랑도 멀어지기 싫다며? 그렇게 백날 애매하게 갈팡질팡하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란 말이야."
"둘 중 하나는 꼭 포기해야 되는 거야?"
"그건 너 하기에 달렸겠지 뭐. 둘 다 잡을 수도 있고, 둘 다 망할 수도 있고."
무슨 그런 무책임한 소리가 다 있냐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나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 그건 누나에게 결정을 떠넘기는 꼴이 되는 거였다.
"그럼 누나. 딱 하나만 더 물어볼게."
"응."
나는 심호흡을 하고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해나도 날 좋아할까?"
누나는 이번에야말로 황당하다는 듯 혀를 찼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니?"
이번에는 내가 말이 없었다. 몇 초가 지나자 누나가 여보세요, 하며 살며시 나를 불렀다. 나는 듣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와, 신기하다. 윤승연이 벌써 머리가 커서는 누나한테 이런 상담도 다 하네."
"응…… 그래. 나 그것부터 해야 될 것 같아."
"뭘 말이야?"
"달리기."
누나는 전화를 끊을 때까지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물론 이제 와서 그런 건 상관없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고 모래사장에서 조약돌 하나를 쥐었다. 바다 너머로 휙 집어 던졌다.
누나 말이 맞았다. 어떤 선택을 해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누가 대신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뭔가를 시도해봐서 후회할 수도, 안 해서 후회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어느 길을 가든 안 좋은 결과가 생길지도 모르는 거고.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나는 오히려 내 마음이 더 강하게 움직이는 쪽으로 가야겠다.
며칠 전, 우리 2반 계주팀은 4반 팀에게 졌다. 해나가 있는 그 팀에게 진 것이다. 다음에는 지지 않기로 결정했다. 운동회 날에 있을 진짜 게임에서는 말이다. 물론 결심만 한다고 이뤄지는 일은 아니다. 말마따나 4반에는 운동 잘하기로 소문난 녀석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연습을 해야겠다.
이제부터 남은 2주 동안. 그 정도 연습한다고 그렇게 대단한 성과가 있을지는 의심스럽지만, 일단 해봐야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알 수 있다. 그러고 나서 정말로 달리기에서 이기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 다음은 무슨 일이 벌어질까?
나는 작달막한 해변을 뒤로하고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바깥 세상으로 나왔다.
날짜가 별로 많이 남지 않았다. 나는 당장 달리기로 했다. 다음날은 일요일이었다. 아침 일찍 바로 벌떡 일어나서 동네를 몇 바퀴씩 돌고 들어왔다. 엄마는 내 그런 모습에 좀 당황했는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거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나는 그저 건강을 위해 운동한다고만 답했다.
하루를 그렇게 뛰어다니고 나니 내가 연습해야 되는 것은 단거리 경주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구력을 높여서 나쁠 것은 없겠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어차피 속도였다.
월요일에 학교에 가니 벌써부터 저번주에 달리기 연습 경기에서 보기 좋게 패배한 것이 좋은 화제거리가 되어 있었다. 주목은 평소 나보다 목소리 큰 다른 계주 팀원들에게 몰렸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렇게 많은 화살이 쏟아지진 않았다. 다만 그런 분위기는 나를 수그러들게 만들기 보다는 좀 더 자극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그날 학교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 나는 집 근처의 넓은 공터로 가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분명 같이 있어 달라고 부탁한 건 세찬이뿐이었는데 어째서 민욱이랑 규진이까지 슬그머니 나타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싫다는 건 아니었다. 단둘이 썰렁한 공터에 있는 것 보다는 말소리가 많은 게 연습하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