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 운동한다고 죽지는 않는다.
"윤승연 웬일로 이런 거에 이렇게 열심히야? 이런 애 아니지 않았냐?"
"그러니까. 무슨 바람이 불어서."
민욱이가 평소처럼 장난기 있는 어조로 말을 붙였다. 규진이도 그리 다를 바 없이 한 마디 거들었다. 나는 진짜 이유를 말하기 보다는 적당히 둘러댔다.
"좀 졌다고 반에서 애들이 얼마나 떠들었는지 알아? 이왕 하는 거 잘해야지."
해나를 싫어하는 규진이를 보자 마음 한구석이 조금 불편해지긴 했다. 그렇지만 내가 규진이한테 뭐든 빚진 것도 없는 건 사실이다. 이건 그냥 달리기 연습에 불과할 뿐이니까. 물론 그걸 넘어선 진짜 목표는 해나이긴 했다. 그래도 여기서 내 생각을 전부 털어놓고 규진이에게 허락이라도 받는 것은 우스운 일 아닌가. 무엇보다 해나는 애초에 규진이한테 아무런 잘못도 한 적이 없다.
"그건 그렇고 언제까지 하다 갈 거야?"
"너희 먼저 가고 싶으면 가도 돼. 난 좀 더 하다 갈 거야."
인터넷에 검색해서 달리기 연습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아봤다. 거기 나온 자세와 방법을 따라서 열심히 뛰었다. 세찬이는 기록을 재 줄 사람이 필요해서 부른 거였다. 그래서 지금도 세찬이는 스톱워치로 내 기록을 재고 있었다. 동영상을 보고 나름대로 따라해보고는 있지만 이게 정말 제대로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결과 세찬이가 기록이 처음보다 좋아졌다고 말하긴 했다. 정말 실력의 향상일까, 아니면 그냥 우연일까.
시간이 꽤 지나자 구경하던 친구들은 슬슬 진짜로 지겨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나는 거기 휩쓸리고 싶지 않았다. 남들 눈에는 단순한 변덕으로 적당히 연습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내게 이건 가벼이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될 때까지 한다. 만약 해도 안 된다면?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해 볼 일이다.
하지만 계속 이러다간 내일 힘들어서 일어나지도 못할 거라는 친구들의 말은 꽤 신빙성이 있었다. 그만큼 진심이었으니, 오늘 하루만 연습하고 그만둘 게 아니라면 지나치게 무리해서도 곤란했다. 평소에 이런 운동을 자주 하지 않는 나는 이 정도로도 제법 무리한 셈이었다.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내가 너무 열심히 하자 친구들은 의외인 듯 당황한 눈치였다. 얘네들은 평소의 나를 아니까. 조금 하다가 관두거나 적당히 요령을 피울 줄 알았는데 진지하게 몰두하니 그럴 만도 했다.
"너 진짜 내일도 똑같이 할 거야?"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자 듣는 녀석들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 됐다. 처음 시작할 땐 희희낙락하더니 이제는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라고 말하고 싶은 듯했다.
남이야 어떻게 느끼건 상관없었다. 나는 다음날에도 똑같이 연습했다. 누군가가 말했듯 그러고 나서 아침에 일어나려니 몸 곳곳이 콕콕 쑤시기는 했다. 등교하는 동안에는 팔다리에도 영 기운이 없어서 내가 정말 이걸 끝까지 해낼 수 있을까 확신이 없어지기는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이 정도 운동한다고 죽지는 않는다.
이틀, 사흘, 똑같은 시각에 똑같은 장소에서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계속 달렸다. 그때까지 친구들은 첫날처럼 같이 나와 잡담도 하고 때로는 같이 뛰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변함없이 진지한 내 태도에 점차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사흘째까지는 네 명 모두 끝까지 나랑 같이 있어주다 가긴 했지만 나흘이 됐을 땐 내가 재미없으면 먼저 가도 된다고 하니 슬금슬금 빠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는 처음과 다름없이 열심히 연습에 임했다. 주말에도 마찬가지였다.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도, 혼자서라도 계속 뛰었다. 시간을 재 줄 사람이 없을 땐 내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혹은 발전이 있기는 한 건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괜찮았다. 기껏해야 2주다. 2주 동안 이 정도도 못해서야 뭘 이뤄낼 자격도 없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만 속으로 내내 되풀이했다.
친구들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나를 보기 위해 다 함께 오지는 않았다. 한 번은 두셋이서 오거나, 한 번은 혼자 오기도 하고, 따로따로 왔다가 돌아가는 것도 제각각일 때도 있었다. 아무튼 그들의 나를 보는 일관된 반응은 금방 지쳐 나가떨어질 줄 알았는데 뜻밖에 이를 악물고 연습해서 놀랍다는 거였다.
하루가 멀다하고 연습을 하다 보니 운동회 날도 빠르게 다가왔다. 날짜를 딱 이틀 앞뒀을 무렵, 학교에도 나름대로 들썩이는 공기가 흘렀다.
그리고 나는 그날도 마찬가지로 하염없이 달리고 있었다. 오늘 공터에는 민욱이도 규진이도 없었다. 세찬이만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내 기록을 재 주고 있을 뿐이었다. 세 번째 뛰어서 기록을 확인하려 할 때였다. 이마의 땀을 닦으며 다가가니 세찬이가 기록이 많이 단축됐다며 결과를 보여주었다. 나는 크게 뿌듯한 마음을 느꼈다.
다만 연습한 기간 자체가 길지 않으니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성과는 아니었다. 그 정도로는 다가올 시합에서 지난 패배를 뒤집을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오히려 패배감을 느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을까.
한데 세찬이는 나와 달리 어딘가 탐탁치 않은 듯한 눈빛이었다. 잠깐은 얘가 왜 이러나 싶다가 이내 신경을 끄려 했다. 오늘 딱히 세찬이랑 부딪힐 만한 일도 없었다. 만약 진짜로 기분이 별로라 해도 나와는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출발 지점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세찬이가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야, 근데 너 이거 왜 하는 거냐?"
나는 이제 와서 웬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얼굴이 됐다.
"운동회 때문에 하는 거지. 너야말로 무슨 소리야?"
본래 곧장 출발점으로 돌아가려던 나는 목덜미를 문지르며 나를 보는 세찬이를 보고 발걸음을 멈칫했다. 아무리 봐도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몸짓이었다. 기다리자니 세찬이는 얼른 말을 안 하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그러다 결국 말했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너희 반이랑 시합하는 게 4반이었잖아."
"그게 왜?"
세찬이는 1반이었다. 반이 달랐기 때문에 충분히 우리 반이 어디랑 붙는지에 대해 이때까지 잘 생각해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정확히는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새삼스러운 사실을 갑자기 입에 담는 저의가 궁금하다.
"이번에 보니까 그 여자애가 4반 계주팀에 있더라고."
일부러 약간 둔한 척하긴 했지만 세찬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곧바로 알아들었다. 세찬이는 해나를 직접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개학날 방송 사건으로 잠깐 동안 유명해지기는 했더랬다.
"해나 말하는 거야? 그게 왜?"
내가 계속 모른 체하자 세찬이는 약간 짜증이 나는 듯했다. 정확히 말하면 내 태도 때문이라기보다 하기 싫은 말을 굳이 꺼내기 싫어 보였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걔 때문에 연습하는 거 아니지?"
너무 정곡을 찔러버리는 말이었다. 나는 짧게 행동을 멈췄다. 지금 내가 세찬이를 등지고 서 있어서 다행이었다. 물론 언젠가 친구들에게 사정을 모두 털어놓을 생각이긴 했지만 지금 이건 예상도 못한 시점이었다. 그래서 일단 시치미를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