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찌질한 거 맞는데."
"내가 달리기 연습하는 게 걔랑 대체 무슨 상관이야? 네가 생각해도 말이 좀 이상하지 않냐?"
"너 진짜 걔 좋아해?"
역시나 방심하고 있는 사이 불쑥 들어온 직설적인 말에 나는 다시 대답이 궁해졌다. 제일 먼저 떠오른 방책은 당연히 계속 잡아떼는 거였다. 하지만 그래서야 그냥 상황을 거부하고 숨어버리는 것밖에 안 될 것이다. 지금 여기서 이런 대화를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처음부터 달리기를 하기로 결심한 이상 숨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달리기 잘해서 그 해나라는 애한테 멋있게 보이고 싶다거나…… 그런 거야?"
"그런 거 아닌데."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난 진실을 말한 거였다.
난 이걸 연습해서 딱히 해나에게 잘보이고 싶은 게 아니다. 굳이 그럴 수 있다면 마다하진 않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단순하게 내가 잘 뛰면 해나가 날 다시 볼 거라는 계산은 하지 않았다.
나는 몸을 돌려 세찬이를 보았다. 세찬이는 내가 '이젠 해나한테 마음 다 접었다' 정도의 답변을 하길 기대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나는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내가 해나랑 한 달을 같이 일했잖아. 그러면서 알게 된 건데, 걔는 사소한 데서 지길 싫어하더라고. 남보다 일 한 번 더 하고 싶어한다거나, 5분이라도 일찍 일터에 도착한다거나. 그런 좀 쓸데없어 보이는 구석에서 말이야."
"무슨 소리야? 갑자기?"
"무슨 소리냐면…… 나도 처음엔 그게 잘 이해가 안 갔는데, 사실은 그게 자기 나름대로 어떤 성의를 다하려는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자기 옆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허투루 보지 않으니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거야. 그렇게 최선을 다했는데 졌다고 느끼면 약간 분하긴 하겠지. 근데 그래 놓고도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리긴 하는 걸 보니 결국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한 게 더 중요한가봐."
날 바라보는 세찬이의 미간이 더욱 좁아지는 게 보였다. 내 말이 어느정도는 이해가 가서 그런 건지, 아니면 완전히 헛소리처럼 들려서인지 구분은 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걔를 본받아서 한 번 승부욕 좀 가져 보려고. 그런 애랑 한 달 같이 일해 보니까, 나는 오히려 지금까지 뭐가 되든 그냥 흘러가는 대로만 살았던 것 같더라……"
거기까지 말한 나는 한 박자를 쉬었다. 그 다음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건 상당히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런 애니까…… 나도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거야. 이 정도도 안 하고 그냥 교실 구석에 찌그러져서 걔가 하는 방송이나 듣고 있으면…… 좀 많이 찌질해 보이잖아."
세찬이는 한참 입을 다물고 있다가 툭 뱉었다.
"너 찌질한 거 맞는데."
"그러니까 아니게 돼보겠다고."
세찬이는 꽤나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보건대 내 말을 전부 알아듣진 못한 것 같았다. 대신 닭살 돋는다는 표정을 건네서 나를 민망하게 만들었다. 나도 돌이켜 보니 내 생각을 가감 없이 입으로 내뱉는 바람에 일기장을 들킨 기분이 되었다.
세찬이가 날 보며 팔을 휘저었다. 달리기 출발 위치로 돌아가라는 의미였다. 나도 더 이상 입씨름하기 싫어 순순히 멀찍이 걸어갔다. 그로부터 몇 번이나 더 뛰었을까. 숨이 차올랐고 연습을 마칠 때가 되었다.
오늘은 마지막까지 함께해준 세찬이와 귀갓길도 함께하게 되었다. 집 방향이 달라 금방 길이 갈리긴 하겠지만 어쨌든 공터에서는 같이 나왔다.
"규진이가 그 여자애 싫어하는 건 알지?"
세찬이가 넌지시 건넨 말이었다. 그 소리에는 이제 솔직히 좀 신물이 났다.
"솔직히 난 규진이가 왜 그러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 해나가 규진이한테 잘못한 건 없잖아. 근데 왜 자꾸 걔를 안 좋게 보는 거야?"
"걔가 너랑 엮일지도 모르는 게 싫은 거겠지."
내 머릿속에서 해나는 한 번도 나쁜 애였던 적이 없었다. 규진이가 해나를 불편하게 느끼게 된 이유, 왜 그 불량배들과 같이 있었는지도 본인이 이미 해명했다. 애초에 나한테 해명할 이유도 없긴 했지만, 하여튼 그 말이 거짓말로 들리지도 않았던 것이다. 나도 사람의 유형을 나눠서 보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규진이는 그게 무척 극단적인 게 아닌가 싶었다. 얘는 나쁘니까 여기, 쟤는 착하니까 저기, 그렇게 몇 가지 선으로 나눠야만 속이 시원한 걸까.
"난 솔직히 내가 뭘 해야 될지는 모르겠다. 네가 알아서 규진이한테 말 잘해라. 난 간다."
그 말을 남기고 세찬이는 손을 흔들며 다른 길로 달려갔다. 나는 영 못마땅한 기분이 되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저번부터 그랬지만 이번 일에 대해 세찬이는 미묘하게 규진이 편을 들어주는 면이 있었다.
물론 나도 친구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난 이미 결정을 했다. 그 결정을 관철하려 노력 중이었고. 여기서 한 발 물러나버리면 많은 것을 놓치고 말 것 같았다. 이 기회…… 이걸 기회라고 불러도 될까?
그래……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를 기회다.
그런 묘하게 껄끄러운 기억을 남겼던 밤이 또 한 번 넘어갔다. 그놈의 운동회까지 남은 시간은 단 하루였다. 이제부턴 새롭게 날 괴롭힐 사건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그건 틀렸다. 담담하게, 한편으론 초조하게 내일을 기다리기만 할 하루가 될 줄 알았건만. 그것을 목격하게 된 건 저녁을 먹고 자습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그때 나는 교문 근처를 민욱이, 규진이랑 같이 어정거리고 있었다. 민욱이가 뭔가를 보고는 갑자기 표정이 약간 굳더니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체하며 얼른 본관으로 들어가려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규진이는 그런 민욱이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나는 어딘가 어색해 보인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 민욱이가 봤던 방향으로 눈을 던졌다.
그리고 교문 앞에 있는 해나를 발견했다.
혼자는 아니었다. 그 옆에는 저번에 시내에서 나도 본 바가 있던 친구가 있었다. 그리고 교문을 넘을락말락한 위치에서 그 둘에게 손을 흔들어대고 있는 남학생 두 명도 낯이 익었다. 다름아닌 여름방학에 우리에게서 농구 코트를 빼앗았던 무리에 있던 녀석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학교 학생일 텐데, 지금 저기서 저러고 있는 것은 분명히 해나와 같이 있는 친구를 일부러 찾아온 거다.
어느새 나를 따라 그쪽을 쳐다본 규진이의 얼굴이 확 굳었다. 내 얼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왜 하필이면 오늘, 이런 타이밍일까. 해나가 저 무리와 같이 있는 걸 이런 식으로 보게 되다니.
저도 모르게 우리가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봤나 보다. 두 남학생의 눈이 우리에게로, 정확히는 규진이에게로 향했다. 규진이가 움찔하자마자 그 녀석들이 손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야! 김규진! 김규진 맞지!"
"오랜만이다!"
말의 내용 자체는 오히려 친근하게 들릴 정도였으나 어투는 위협마저 느껴졌다. 그 등쌀에 해나가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내 눈과 딱 마주쳤다. 그 순간, 나는 몇 주 전 시내에서와 달리 그 눈동자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혼란을 분명히 봤다고 확신했다.